[뉴스+]유럽은 왜 정치권까지 나서서 슈퍼리그를 반대했나

  • 등록 2021-04-22 오전 11:00:00

    수정 2021-04-26 오전 8:24:15

[이데일리 스타in 이석무 기자] 이 기사는 이데일리 홈페이지에서 하루 먼저 볼 수 있는 이뉴스플러스 기사입니다.

유럽 프로축구 빅클럽들이 창설을 선언한 ‘유러피언 슈퍼리그’가 대대적인 반대에 부딪히면서 순식간에 좌초하는 분위기다. 처음 출범 발표 당시 참가하기로 했던 12개 팀 중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EPL) 소속 6개 팀이 이틀만인 21일(한국시간) 불참을 선언하면서다. 영국 정부와 왕실조차 격렬하게 반대 목소리를 냈기 때문이다. 이를 계기로 슈퍼리그 추진은 잠정 중단됐다.

직접적인 이해관계가 얽혀 있는 유럽축구연맹(UEFA)이나 국제축구연맹(FIFA)과의 갈등은 이해가 가지만 정부와 왕실까지 축구리그에 목소리를 낸다는 것 자체가 우리 입장에서는 낯설다.

올리버 다우든 영국 문화부 장관은 19일(현지시간) 의회에 보낸 성명에서 “ESL 창설을 막기 위해 모든 수단을 동원하겠다”고 밝혔다. 잉글랜드축구협회 회장인 윌리엄 왕세손은 할아버지인 필립공을 애도하는 상황에서도 자신의 SNS를 통해 “슈퍼리그는 우리가 사랑하는 축구를 훼손할 우려가 크다”고 반대 의사를 분명히 했다.

영국 뿐이 아니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도 슈퍼리그 창설 움직임에 “연대와 스포츠 원칙을 위협하는 행위”라며 “프랑스 구단들의 참가 거부를 환영한다”고 말했다.

자국팀의 슈퍼리그 참가 가능성이 낮은 포르투갈 정부 역시 “슈퍼리그에 반대한다”며 “사회적 측면에서 리그를 보전하는 건 중요한 일”이라고 공개적으로 밝혔다.

슈퍼리그 창설에 반대하며 “슈퍼리그 참가 6개 구단은 세계적 브랜드 이상의 의미가 있다”고 한 보리스 존슨 영국 총리의 말에서 그 이유를 엿볼 수 있다. 각 지역에서 시작하고 성장한 영국 프로 축구팀들은 지역 팬을 기반으로 해야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그래픽= 김정훈 기자)


승강제 없는 슈퍼리그, 스포츠의 ‘희망 메시지’ 배제

슈퍼리그는 빅클럽 간의 맞대결을 더 많이 볼 수 있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요소도 있다. TV와 인터넷의 발달로 프로스포츠의 이미 세계화가 된 상황에서 슈퍼리그는 대단히 매력적인 이벤트임에 틀림없다. JP모건, 넷플릭스, 아마존 등 글로벌 기업들이 슈퍼리그에 적극 관심을 나타낸 것은 슈퍼리그라는 콘텐츠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해서다.

그럼에도 격렬한 반대가 이어진 것은 슈퍼리그가 유럽 프로축구의 뿌리 깊은 승강제를 거스르기 때문이다. 승강제의 가장 큰 특징은 기회가 열려 있다는 점이다. 팬들은 ‘우리 동네 프로팀도 열심히 하면 1부리그에 올라갈 수 있다’는 희망을 갖는다. 이는 자기 지역의 중소 클럽들을 열렬히 응원하는 원동력이 된다.

슈퍼리그는 얘기가 다르다. 창립 멤버 15개 팀은 꼴찌를 하더라도 매 시즌 참가가 보장된다. 창립 멤버가 아닌 팀들은 아무리 노력해도 슈퍼리그에 들어갈 수 없다. 5개 팀에 문을 열어놓는다고 하지만 이 역시 구단의 규모나 자본력 등에 의해 좌우될 가능성이 크다.

예를 들어 이번 시즌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3위 레스터시티와 4위 웨스트햄, 이탈리아 세리에A 3위 아탈란타 등은 기존 시스템이라면 다음 시즌 챔피언스리그 본선에 나갈 수 있지만 슈퍼리그는 그렇지 않다. 축구 외적인 요소 때문에 축구로 경쟁할 기회를 박탈당한다는 문제가 생긴다.

잉글랜드만 놓고 볼 때 슈퍼리그에 나가는 6개 팀들의 연고지는 런던(첼시, 아스널, 토트넘)과 맨체스터(맨체스터 유나이티드, 맨체스터 시티), 리버풀(리버풀) 등 일부 대도시로 한정돼 있다. 기회 자체를 얻지 못하는 나머지 중소 도시 클럽들의 지역 팬들이 느끼는 박탈감이 크다.

위르겐 클롭 리버풀 감독의 발언은 유럽이 슈퍼리그를 바라보는 분위기를 잘 보여준다. 그는 “나는 축구의 경쟁적인 측면을 좋아한다”며 “웨스트햄이 다음 시즌 챔피언스리그에 나가는 것을 원하지 않지만, 웨스트햄이 이에 도전할 수 있는 시스템은 좋아한다”고 말했다.

보리스 존슨 영국 총리. 사진=AP PHOTO


유럽 스포츠 자존심, 미국 자본에 잠식 ‘경계’

슈퍼리그에 미국 자본과 시스템이 깊이 개입됐다는 점도 유럽인들의 반감을 사기에 충분했다. 유럽에서 축구라는 스포츠는 ‘자존심’과 같은 종목이다. 하지만 슈퍼리그는 미국 금융회사인 JP모건이 막대한 자본을 대고 미국의 OTT서비스 회사인 넷플릭스가 중계권을 가질 예정이었다.

승강제 없이 고정 멤버들이 경쟁을 벌이는 폐쇄적 방식도 메이저리그 등 미국 프로스포츠의 특징이다. 재주는 유럽이 부리고 돈은 미국이 가져간다는 비판이 나와도 할 말이 없다.

사실 미국 자본이 유럽 축구에 진출한 것은 이미 오래전이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소유한 글레이저 가문이나 리버풀의 구단주인 존 헨리는 미국 국적이다. 존 헨리 구단주는 메이저리그 보스턴 레드삭스의 구단주이기도 하다.

현재 축구 해설가로 활동하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전설적인 수비수 게리 네빌은 미국이 유럽 축구를 흔드는 것에 대한 강한 반감을 숨기지 않았다. 그는 “슈퍼리그에 참여하려는 구단주들은 이 나라 축구와 아무 관련이 없다”며 “이 나라에는 클럽의 팬들과 함께 해온 100년이 넘는 역사가 있다”고 비판했다.

슈퍼리그 창설에 반대하는 잉글랜드 축구팬들이 첼시 클럽 앞에서 격렬하게 시위를 벌이고 있다. 사진=AP PHOTO


축구는 산업…중소도시 경제적 타격 우려도

보리스 존슨 영국 수상과 올리버 다우든 영국 문화부 장관의 반대 입장 발표에는 슈퍼리그 창설이 축구계를 넘어 영국 사회 전체에 큰 영향을 미칠 것이 불을 보듯 뻔했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있다.

몇 년전 발표된 한 연구 보고서에 따르면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경기에 직접적으로 관련된 정규직 일자리는 대략 10만개 이상이다. 파트타임 아르바이트나 간접적으로 파생되는 일자리까지 포함하면 그 규모는 몇 배에 이른다.

코로나19가 터지기 한참 전 정말 열기가 뜨거웠던 2013~14시즌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20개 클럽이 정부에 납부한 세금 총액은 24억파운드, 우리 돈으로 3조7000억원이 넘는다.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는 영국 정부 입장에서 단순히 스포츠를 넘어 지역경제의 한 축을 담당하는 산업 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슈퍼리그가 창설되면 자국 리그는 자연스럽게 하부리그로 전락하게 된다. 빅클럽들은 슈퍼리그에서 막대한 부를 얻겠지만 스몰마켓 클럽들은 자국 리그에서 벌어들일 수입이 줄 것이 틀림없다. 이는 곧 지역 사회 경제에도 심각한 영향을 미칠 것이 뻔하다. 총리가 앞장서서 슈퍼리그 출범을 막아야 하는 분명한 이유가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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