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어가 지닌 속뜻을 음미하며 2008~2009 시즌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를 들여다보면 또렷하게 대비되는 행보를 보이는 두 클럽 토트넘(18위)과 헐시티(6위)를 떠올리게 된다.
정규리그 초반 토트넘의 발자취는 그야말로 ‘최악’에 가까웠다. 당초 ‘우승 청부사’ 후안데 라모스 감독이 건재한데다 H.고메스(GK), L.모드리치, G.도스 산토스, D.벤틀리(이상 MF), R.파블류첸코(FW) 등 준수한 새 얼굴이 가세해 빅4 진입 여부가 관심을 모을 정도로 주목받았지만 예상 밖 부진에 빠져 최하위로 추락하는 등 험난한 길을 걸어야 했다. 미들즈브러(1-2패), 선덜랜드(1-2패), 아스톤빌라(1-2패), 포츠머스(0-1패), 스토크시티(1-2패) 등 중하위권 클럽들에게 줄줄이 무너지고 유럽축구연맹(UEFA)컵 무대에서도 기대 이하의 경기력을 선보이며 아슬아슬한 승부를 지속해 홈팬들을 실망시켰다.
10월말 께 갑작스럽게 라모스 감독이 경질된 건 토트넘 관계자들에겐 ‘추락의 완결판’이자 ‘수렁 속에서 마지막으로 움켜 쥔 동아줄’이었다. 새롭게 부임한 해리 레드냅 감독이 암울한 팀 분위기를 개선시키지 못할 경우 구단 입장에서도 더 이상 취해볼 조치가 없었던 까닭이다. 당시 끝 모를 부진에 대한 원인 분석과 더불어 강등 가능성을 점치는 언론의 기사가 끊이지 않았던 건 토트넘이 ‘최악의 비상시국’에 처해 있었음을 보여주는 증거자료다.
반면 헐시티의 초반은 어느 팀 부럽지 않을 만큼 산뜻했다. 1904년 창단 이후 104년 만에 처음으로 프리미어리그에 진출한데 따른 언론의 스포트라이트가 집중된 상황에서 초반 9경기서 6승2무1패를 기록, 당당히 ‘돌풍의 주인공’으로 자리매김했다. 3위권이라는 성적도 돋보였지만 아스널과의 원정경기서 2-1로 승리를 거두는 등 강호와의 경기서도 흔들림 없는 모습을 선보인 점이 높은 평가를 받았다. 지구 반대편에 있는 국내 팬들에게도 ‘신생팀 돌풍’, ‘막내의 반란’ 등의 제목을 달고 헐시티의 선전 사실이 빠짐없이 보도됐을 정도니 과장을 약간 보태 올 시즌 초반 토트넘이 ‘지옥’을 경험했다면 헐시티의 발자취는 ‘천국’쪽에 가까웠던 셈이다.
감독이 바뀐 이후 3경기를 치른 것이 전부이니 섣부른 판단은 곤란하겠지만 아스널과 난타전 끝에 4-4로 비기고 리그 1위 리버풀을 2-1로 격파하는 등 최근 토트넘이 보여주는 분위기는 분명 시즌 초반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특히나 최근 치른 리버풀전의 경우 무패가도(8승2무)를 달리며 자신감이 충만하던 팀을 꺾었다는 점, 먼저 한 골을 실점하고도 집중력을 유지해 역전승을 일궈낸 점 등이 좋은 평가를 받았다.
더욱 희망적인 건 팀 구성원이 한데 뭉치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경기 직후 레드냅 감독은 “선수들이 스스로를 믿을 수 있도록 이끌어줬을 뿐”이라며 제자들에게 승리의 공을 돌린 반면 데이비드 벤틀리 등 선수들은 “새 감독 부임 이후 희망이 보이기 시작했다”며 스승의 지도력을 원동력으로 꼽았다. 구성원 모두가 서로 헐뜯고 비난하던 과거와는 확연히 달라진 모습이다.
스코어만 보면 치열한 공방전을 펼친 것처럼 여겨지기도 하지만 엄밀히 말해 주어진 골 찬스를 철저히 살린 결과일 뿐, 흐름면에서는 시종일관 상대에 주도권을 내준 채 어려운 경기를 펼쳤다. 신바람을 내며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비상하던 헐시티가 비로소 ‘뚫어내기 힘든 천장’과 맞닥뜨린 셈이다. 필 브라운 헐시티 감독은 “(2패는) 어느 정도 예상했던 결과인 만큼 전체적인 팀 분위기에는 지장이 없을 것”이라며 짐짓 태연한 모습을 견지하고 있지만 ‘EPL 초심자’ 헐시티 선수들이 프리미어리그 무대에서 처음으로 허용한 연패에 대해 어떻게 반응할지의 여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초반 분위기를 기준으로 ‘급격한 반전’을 경험 중인 양 팀은 과연 현재의 흐름을 유지(토트넘) 또는 쇄신(헐시티)할 수 있을까. 오래 전 중국 변방에 살던 이름 모를 노인(새옹)은 장기레이스에서 작은 성취나 좌절에 일희일비하지 않는 대범함과 유연성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다시금 일깨워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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