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들의 친구, 야구] 백차승, '패했으나 지지 않았다'

LA 에인절스전 재미 만점 4대목

  • 등록 2007-05-17 오후 8:06:34

    수정 2007-06-10 오후 6:24:01

▲ 백차승 [뉴시스/로이터]

[로스앤젤레스=이데일리 SPN 한들 통신원] 백차승(시애틀 매리너스)이 16일(현지시간) LA 에인절스전서 올 시즌 5경기만에 첫 패를 당했습니다. 6.1이닝 6피안타 3실점(자책) 3탈삼진 1볼넷의 성적이었습니다.
 
하지만 결코 지지 않았습니다. 등판할 때마다 문자 그대로 일신우일신(日 新又日新)하는 모습을 또다시 보여줬기 때문입니다. 알에서 깨어난 새가 겨드랑이에서 날개가 돋고, 날갯짓 하다가 둥지를 박차고 날아오르듯 더 높이 비상할 가능성을 한껏 보여줬습니다.

이날 경기는 백차승의 퀄리티스타트에 걸맞는 호투뿐만 아니라 짚고 넘어가야 할 재미있는 대목도 몇 가지 있었습니다.

1. 백차승 몸 쪽 승부 눈뜨다

피칭 내용만 놓고 보면 가장 눈에 띈 게 몸 쪽 승부였습니다.
백차승은 1회 초 시작하자마자 볼넷과 폭투에 연속 적시타 등 3안타를 맞고 2실점했습니다. 선두 레지 윌리츠에게 원 스트라이크 후 우중간 2루타를 맞았습니다. 1사 후 블라디미르 게레로에게 정면 승부를 피하다가 볼넷을 내준 커브가 폭투가 돼 1, 3루에 몰렸습니다. 이어 4, 5번 개리 매튜스 주니어와 케이시 카츠먼에게 연속 우전 안타를 허용, 패배의 빌미가 된 2점을 내줬습니다.

그러나 과정을 보면 나무랄 게 없습니다. 1루가 비어있는 상황서 '공포 그 자체'인 게레로에게만 바깥쪽 승부를 했을 뿐 모두 왼쪽인 이들에게 철저히 몸 쪽을 파고들었습니다. 다만 몸 쪽을 노리고 던진 공이 가운데로 쏠리거나(카츠먼, 81마일 슬라이더), 타자가 잘 노려 쳐(윌리츠 84마일 슬라이더, 매튜스 82마일 슬라이더) 어쩔 수 없었습니다.

몸 쪽 승부가 빛을 발한 것은 3회였습니다. 두 타자의 방망이가 부러져 나갈 정도였습니다. 선두 2번 올랜도 카브레라에게 1-1서 85마일 몸 쪽 체인지업을 던져 방망이가 부러지면서 중견수 이치로 스즈키에게 한발 못 미쳐 떨어지는 텍사스 히트가 됐습니다.
 
 이어 게레로를 초구에 같은 코스로 3루 땅볼로 잡은 뒤 매튜스에게는 1-1서 몸쪽 86마일 슬라이더를 던졌는데 다시 부러지며 투수 앞 땅볼이 됐습니다. 후속 카츠먼에게 승부구도 역시 몸 쪽 낮은 86마일 슬라이더(3루 플라이)였습니다.

눈여겨 볼 것은 이들이 모두 상위 타자들이었다는 점입니다. 지난 9일 디트로이트전서 데뷔 첫 완투승을 거둔 백차승이 얼마나 자신감 넘치게 던지고 있는가를 여실히 보여주는 아주 긍정적인 대목입니다. 거꾸로 하위 타자들에게는 과감하게 바깥쪽 승부로 농락, 거의 무사통과 '백차'(白車) 피칭을 하였습니다.

투수에게 몸 쪽 승부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바깥 쪽을 잘 던지면 10승 투수 밖에 안되지만 몸 쪽까지 던질 줄 알면 15승 투수가 된다는 말이 있을 정도니까요.

2. 백차승 '최고 지장' 소시아의 허를 찌르다

에인절스 마이크 소시아 감독은 메이저리그 최고의 지장입니다. 잔수가 많아 작전을 즐기는 '스몰볼'의 상징입니다. 포수 출신이어서 자기네 투수와 상대 타자를 읽는 눈도 뛰어나 일일이 포수에게 볼 배합을 수렴청정 합니다.
 
포스트시즌 같은 큰 경기에 가면 원 스트라이크 투볼서 볼을 빼 작전(히트앤드런 또는 보내기 번트)에 따라 2루로 뛰는 1루 주자를 잡아 내기도 합니다. 지략과 뚝심을 겸비했습니다. 한국으로 치면 김인식 감독이나 김재박 감독과 비슷합니다.

그런데 백차승이 그런 소시아 감독에게 결과적으로 승리(?)했습니다. 바로 6회 1사 1, 2루의 위기서 6번 타자 에릭 아이바를 2루 병살 땅볼로 솎아내는 장면이었습니다.

선두 게레로에게 풀카운트서 바깥 쪽 커브로 중전 안타를 맞은 백차승은 매튜스를 몸 쪽 85마일 슬라이드로 헛스윙 삼진으로 잡았습니다. 이어 카츠먼에게 89마일 투심 패스트볼로 2루 땅볼을 유도했습니다. 그런데 그만 유격수가 송구를 떨궈 졸지에 1사 1, 2루에 처하고 말았습니다. 백차승이 소시아 감독의 허를 찌른 것은 아이바 타석에서였습니다.

투수로서는 기분이 안 좋은 대목이었습니다. 가뜩이나 타선이 에인절스 선발 잔 래키에게 무득점으로 눌려 스코어도 요지부동인데다 실책까지 겹쳤으니 어지간히 정신이 산란할 법도 했습니다. 또 소시아 감독이 이를 놓치지 않을 타이밍이었습니다.

예상대로(?) 백차승은 초구 스트라이크를 잡으러 88마일 패스트볼로 한 복판을 찔렀습니다. 위험천만이었습니다. 그런데 웬일입니까. 아이바가 공을 그대로 흘려 보냈습니다. 2회부터 타자들이 백차승에게 눌려 추가점을 내지 못하자 다소 초조한 빛마저도 보였던 소시아 감독이고, 그의 스타일이라면 당연히 히트앤드런이 나올 타이밍이었는데 아무런 작전도 안 나온 것입니다.

왜일까요? 소시아 감독도 상위 타자들에게는 몸 쪽 승부, 하위 타자들에게는 바깥 쪽 승부(변화구가 됐던, 패스트볼이 됐던)를 한 백차승의 볼 배합에 움찔하고만 것입니다. 거기에는 이날 소시아 감독이 처음으로 백차승을 상대해본 '초면 효과'도 있었을 것입니다. 결국 아이바는 2구째 79마일 바깥쪽 커브를 잡아 당겨 2루 병살 땅볼로 물러나고 말았습니다.

하루 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고 덤빈 승부이긴 했으나 어찌됐든 결과는 백차승의 승리였습니다.

3. 소시아, 반항아에게 한방 먹이다

그러나 소시아 감독의 저력은 곧 바로 발휘됩니다. 찬스 뒤에 위기라고 곧 이은 말수비서 래키가 연속 안타를 맞고 처한 무사 1,2루. 마이크 하그로브 시애틀 감독은 2번 호세 비드로에게 두 차례 거푸 보내기 번트까지 시키며 끝내 2루 땅볼로 1사 2, 3루를 만들었습니다. 동물적으로 승부처라는 것을 직감한 것입니다.

그러자 소시아 감독도 4번 라울 이바네스를 고의 4구로 거른 뒤 만루책을 씁니다. 그리고 보기 좋게 후속 리치 섹슨과 호세 기옌을 각각 초구에 3루 땅볼, 풀카운트 접전 끝에 삼진으로 솎아내 흐름을 되돌려 놓습니다.

기옌이 누구였던가요? 지난 2004년 에인절스 시절 시즌 막판 경기서 안타를 치고 나간 그를 대주자로 교체하자 덕아웃에 들어와 헬멧과 글러브를 집어 던지고, 라커룸에서 소리를 지르며 몸싸움까지 벌이며 소시아 감독에게 대들었던 바로 그 선수였습니다.

하지만 소시아 감독은 냉정했습니다. 2사 만루, 풀카운트서 래키에게 바깥쪽 땅으로 박히는 커브를 던지게 해 기옌을 헛스윙 삼진으로 잡아내고 맙니다.

그는 거기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곧 이은 7회초 공격. 백차승이 선두 7번 셰이 힐렌브렌드에게 중전 안타를 맞고 보내기 번트 실패 후 계속된 1사 1루. 하그로브 감독이 백차승을 강판시키자 소시아는 예의 현란한 작전으로 승부를 가릅니다. 볼넷으로 이어진 1, 2루서 적시타로 한점을 달아난 뒤 더블 스틸에 이어 다시 카브레라의 2타점 좌전 안타로 5-0. 그걸로 승부는 끝이었습니다.

4. 백차승 교체 타이밍 어쩔 수 없었다

한국 팬들에게는 하그로브 감독의 백차승 교체 타이밍이 아쉽기 짝이 없었겠습니다. 하지만 투구수가 95개에 이르렀고 무엇보다 거기가 더 이상 물러설 수 없는 감독의 승부처였습니다. 더욱 에인절스 타자는 9번 스위치타자 션 피긴스였습니다. 좌완 불펜 투수를 올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결과는 실패로 돌아갔지만 감독으로선 당연하면서도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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