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 영화였다", 故최은희의 인생극장

  • 등록 2018-04-17 오전 9:32:31

    수정 2018-04-17 오전 9:32:31

‘청일전쟁과 여걸민비’ 명성황후로 분한 최은희의 열연 (사진=한국영상자료원)
[이데일리 스타in 박현택 기자] 영화보다 영화같은 삶을 살다 떠난 여인. 원로배우 최은희의 별세에 추모 행렬이 이어지고 있다.

故최은희가 16일 오후 지병으로 별세했다. 향년 92세. 고인의 장남 신정균시는 연합뉴스와의 통화에서 “어머니께서 오늘 오후 신장투석을 받기위해 병원에 갔다가 세상을 떠나셨다”다고 전했다. 2006년 전 남편 故신상옥 감독이 먼저 세상을 떠난 후, 건강이 악화된 것으로 알려졌다.

故최은희
고인의 삶은 영화 그 자체였다.

1926년생 故최은희는 1942년 연극 ‘청춘극장’으로 데뷔했다. 이후1947년 ‘새로운 맹서’를 통해 영화계에 발을 딛었고 ‘밤의 태양’, ‘마음의 고향’등으로 스타덤에 올랐다.

김지미, 엄앵란과 함께 1950∼60년대 트로이카로 떠오른 고인은 1976년까지 130편의 영화에 출연하며 생전 한국 영화계의 산증인이자 은막의 스타로 불렸다.

고인은 또한 1953년 다큐멘터리 영화 ‘코리아’에 출연하면서 신상옥 감독과 사랑에 빠진 그는 1954년 결혼한 뒤 함께 한국 영화의 중흥기를 이끌었다. 부부가 만든 ‘꿈’(1955), ‘젊은 그들’(1955), ‘지옥화’(1958), ‘춘희’(1959) 등의 영화들은 전쟁이후 한국 영화사 발전에 큰 영향을 줬다.

‘민며느리’, 배우이자 감독으로 맹활약한 최은희 (사진=한국영상자료원)
또한 한국의 세번째 여성감독이기도 했던 고인은 연출과 주연을 맡은 ‘민며느리’로 대종상영화제 여우주연상을 받기도 했다.

1976년 신 감독과 이혼한 고인에게는 또다른 영화가 펼쳐졌다. 1978년 1월 홀로 홍콩에 갔다가 북한 공작원에 납치됐고, 이후 신 감독도 그해 7월 납북돼 두 사람은 1983년 북한에서 재회한다.

두 사람은 북한에서 신필름 영화 촬영소 총장을 맡으며 ‘돌아오지 않는 밀사’(1984년), ‘사랑 사랑 내 사랑’(1984년) 등 모두 17편의 영화를 찍었다. 또한 고인은 북한에서 만든 영화 ‘소금’으로 1985년 모스크바 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이는 한국인 최초 해외영화제 수상으로 기록돼있다.

두 사람은 김정일의 신뢰를 얻었고, 1986년 3월 오스트리아 빈 방문 중 미국 대사간에 집입해 망명에 성공했다.이후 10년 넘게 망명 생활을 하다가 1999년 영구 귀국해 다시 고국땅을 밟게 됐다. 고인과 신 감독의 영화 같은 납북, 탈출, 망명스토리는 지난 2016년 개봉한 다큐멘터리 영화 ‘연인과 독재자’(로스 아담·로버트 캐넌 감독)을 통해 알려져 다시금 주목을 받기도 했다.

한국으로 돌아 온 고인은 극단 ‘신협’ 대표로 취임했고 2002년 뮤지컬 ‘크레이지 포 유’를 기획하며 연기와 문화 예술에 대한 열정을 놓지 않았다. 일생을 영화와 문화 발전에 공헌해 온 고인의 열정과 굴곡진 삶은 후배 영화인들의 가슴에 영원히 남을 것이다.

빈소는 서울성모병원 장례식장이며, 발인은 19일 오전이다.

이데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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