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익성의 저니맨⑥]드디어 긴 여행이 시작되다

  • 등록 2010-01-12 오전 11:54:24

    수정 2010-01-12 오후 1:18:27

▲ 사진=삼성 라이온즈

[이데일리 SPN 정철우기자] 상사의 명령은 법이나 다름없다고들 말한다. 세상이 많이 바뀌긴 했다. 지시가 옳지 않다 생각되면 문제점을 제기하고 또 수정되는 과정을 거치게 되는 경우도 많아졌다.

하지만 절차가 너무 복잡하다. 혹 문제가 바로잡히더라도 괜히 골치 아픈 사람으로 낙인 찍히는 건 아닐지 걱정스럽기도 하다. 때문에 그냥 입 닫고 하는 척이라도 하는 것이 맘 편하게 느껴진다.

최익성은 늘 그게 안됐다. 궁금한게 있으면 찾아가 물어야 했고 불합리하게 여겨지는 건 만나 따져야 직성이 풀렸다. 그 대상이 감독이어도 상관 없었다. 결국 그의 풍운은 그런 그의 심지 굳은 행동에서 출발하게 된다.

거듭 말하게 되지만 난 교과서적인 타격폼과는 거리가 멀었다. 기초도 부족했지만 다른 이유도 있었다. 내 목표는 '메이저리거처럼 치는 것'이었다.

야구를 홀로 독학하며 익히던 대학시절, 난 메이저리그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당시 메이저리그를 접할 기회는 많지 않았다. AFKN에서 새벽에 중계하던 것을 빼면 오후 6시30분 CNN의 스포츠 뉴스를 보는 것이 유일했다.

난 두가지를 빼놓지 않고 보려고 노력했다. 야구 뿐 아니라 모든 프로스포츠에 매료됐던 시기였다.

어디서 저런 다이나믹함과 스윙이 나올까. 나는 연구했다. 결론은 먼 곳에 있지 않았다. '그래, 힘이다. 결국 기술의 한계는 힘으로 극복할 수 있다. 둘이 함께 된다면 더 큰 능력을 낼 수 있다'고 결론지었다.

이후 난 웨이트 트레이닝에 많은 시간을 투자했다. 내 우상은 호세 칸세코였다. 칸세코와 같은 선수가 된다는 것이 내 프로젝트였다.

그때만해도 동양과 서양의 야구는 달랐다. 모두들 "우리는 체형이 다르기 때문에 다른 방식을 택해야 한다"고들 했다. 일본식 야구가 대세였다.

내 생각은 달랐다. 같은 인간인데…. 내가 노력해서 서양 선수 같은 힘과 체형을 갖추면 되지 왜 안된다고만 먼저 생각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무모해 보였지만 도전해볼 만한 가치가 있다고 여겼다.

사실 조창수 감독님과도 트러블이 있었다. 남들이 이해하기 힘든 타격폼을 두고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때마다 날 이해해 주시고 다음날이면 웃는 얼굴 맞아주셨다. 늘 감사했다.(대표적인 일본파 지도자인 백인천 감독도 그의 스윙을 용인했었다.)

다시 감독 교체기로 돌아가 보자.

난 소문이 현실로 바뀐 뒤에야 주위에서 왜 날 그리 걱정해 주었는지 알게 됐다. 새로운 감독은 코치였을 때 타격폼 탓에 나와 큰 충돌을 빚었던 인물이었다.

2군 시절 그 코치는 내 타격폼과 캐치볼 실력을 늘 대놓고 놀리곤 했다. 96시즌이 끝나고 마무리 훈련 때 결국 폭발하고 말았다.

타격 훈련하는 그물 뒤에서 어김없이 손가락질을 하고 있었다. "쟨 안돼. 저게 스윙이야. 저렇게 백날 해봐 선수가 되는지."

나도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그날 따라 내가 제일 싫어하는 말인 "안된다"는 표현이 너무 괴로웠다.

난 돌아서서 물었다. "코치님, 왜 제가 안된다고 하십니까."

"넌 안돼. 그 스윙으로는 절대 안돼."

"전 할 수 있습니다. 1년만에 좋은 성적도 거두지 않았습니까."

"안돼. 2군에서나 통하지. 넌 130km 넘는 공은 절대 못쳐. 넌 1군 선수가 아니라 2군 선수야."

"전 충분히 잘할 수 있습니다. 꼭 해냅니다. 만약 1군에서 좋은 성적이 나면 어떻게 하실겁니까."

"그 스윙으로 잘되면…어쨌든 그런 일은 없다."

그렇게 논쟁은 끝이 났다. 1년 뒤 난 20-20을 달성하며 최고의 한해를 보냈다. 그리고 그 코치가 감독이 된 것이다.

동료들은 걱정이 많았다. 그러나 난 개의치 않았다. 어차피 가장 중요한건 나 자신과의 싸움이었다. 환경이나 조건 따윈 생각해본 적 없다.

스프링캠프 때 감독은 내게 한마디를 더 했다. "타격폼 바꿀 수 없겠냐."

난 이해할 수 없었다. 첫 풀 시즌을 성공적으로 끝냈고 나 자신도 스윙에 완전히 적응한 상황이었다.

노스텝으로 치는 것이 문제라고 했다. 난 웨이트 트레이닝으로 스텝 없이 치면서도 충분히 힘을 실을 자신이 있었다.

아닌 것을 "예"라고 할 순 없었다. 나 자신을 속일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훈련이 끝나자 한 코치님이 날 부르셨다. "익성아, 그래도 감독이니까 시키는대로 해라. 아니면 하는 척이라도 좀 해라."

난 고개를 가로저었다. "제가 할 말은 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이건 단순한 문제가 아닙니다. 야구 인생이 걸린 문제라구요."

하지만 코치님의 말도 무시할 순 없었다. 마찰을 일으키지 않으려 애쓰며 캠프를 마쳤다.

시범경기를 앞둔 어느날, 갑자기 2군행 통보가 내려졌다.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그저 묵묵히 받아들였다.

그러나 시범경기를 보면서 마음이 급해졌다. 다른 선수들이 나보다 잘하면 어쩌지?

그러나 더 중요한 건 내 훈련이었다. 내겐 기회가 많이 주어지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개막을 코 앞에 둔 상황에서 다시 1군으로 올라갈 수 있었다.

98시즌은 혼란의 연속이었다. 시즌 초반 두달간 97년의 두배 가까운 성적을 올리기도 했다. 그러자 내 타순에 변동이 생겼다. 톱타자였던 난 5번타자로 기용되기 시작했다.

톱타자로 나서는 것이 편했지만 팀을 위해선 어쩔 수 없었다. 반대로 내가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는데 뿌듯함을 느끼기도 했다.

하지만 결국 부상의 덫에 또 빠지고 만다. 무릎에 공을 맞아 수비를 할 수 없는 상황이 되기도 했고 헤드 퍼스트 슬라이딩을 하다 어깨와 허리를 다쳤다.

주위에선 며칠 휴식을 권했지만 난 어떻게든 경기에 나가고 싶었다. 그러나 결국 그런 시도는 내 성적에 별반 도움이 되지 않았다.

얼마 뒤 난 경기에 나서지 못하는 경우가 늘어났다. 타순도 매번 바뀌었다. 5~6개의 타순을 오가며 아쉬움 속에 시즌을 마쳐야 했다. (시즌 타율 2할6푼2리 14홈런 20도루)

시즌이 끝난 어느날, 모처럼 영화관을 찾았다. 중간쯤 됐을까. 전화벨이 울렸다. "익성씨 죄송합니다. 한화 이글스로 트레이드 됐습니다."

아무 생각이 나지 않았다. 뭘 해야 할지 몰랐다. 서둘러 영화관을 나섰다. 김태한 선배와 김태균, 이승엽 등과 함께 술을 엄청 마셨다.

무슨 말을 들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날 아껴주는 사람들과 함께 있을 수 있다는 것이 좋았다.

그래서 힘을 냈다. 날 버린 걸 후회하게 해주겠다고 다짐했다. 그렇게 짐을 꾸리고 다시 출발했다. 다만 그때까지는 그것이 내 저니맨 인생의 출발점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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