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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스앤젤레스=이데일리 SPN 한들 통신원] '승부사' 백인천 전 감독은 상대의 허를 찌르는 작전을 즐겨 구사했습니다. 대표적인 게 볼카운트가 불리한데도 과감하게 타자에게 히트앤드런을 거는 것이었습니다. 작전의 성패는 병가지상사(兵家之常事)여서 반반쯤 이었습니다.
어느 날 궁금해서 백 감독에게 물었습니다. 그런 작전은 성공하면 더할 나위 없지만 그만큼 실패할 가능성도 많은데 굳이 그렇게 위험을 무릅써야 하는 것인지요?
백 감독의 대답은 명쾌했습니다. "내가 쉬우면 상대도 쉽고, 내가 힘들면 상대도 그만큼 힘든 것이다. 세상에 쉽게 이길 수 있는 길이 있는가? 이기려면 힘들고 어려운 길로 가는 수밖에 없다. 거기에 우리의 틈도 있지만 상대도 똑같은 허점이 있기 마련이다." 그것이 일본 프로야구에서 선수로, 한국 프로야구에서 감독으로 산전수전 다 겪은 '맹장' 백인천의 '승부의 미학'이었습니다.
시애틀 매리너스 백차승이 12일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전서 7점차의 넉넉한 리드를 매조지 못하고 중도 강판되며 결국 승리를 날렸습니다. 5.1이닝 10피안타 1볼넷 5실점(자책), 탈삼진은 4개였습니다 .
4회까지 무실점으로 호투하던 백차승은 7-0으로 벌어진 5 회 1사 후 집중 5안타로 3실점하고 이어 6회 다시 1사 후 연속 안타를 맞고 팀을 추격 사정권에 놓이게 해 공을 넘겨야 했습니다.
백차승이 이날 다 잡은 대어를 놓친 원인도 딴 게 아니었습니다. 승리를 목전에 두고 갑자기 쉬운 길을 택한 게 결정적이었습니다.
1회 2사 만루, 2사 1루를 특유의 변화구 제구력을 앞세워 넘긴 백차승은 타선의 폭발적인 지원이 뒤따르자 3, 4회 안정을 찾았습니다. 3 탈삼진 포함해 여섯 타자를 모두 범타 처리했습니다. 원동력은 공들여 던지는 모습이 역력했던, 바깥쪽 스트라이크존에 아슬아슬하게 걸치는 85~6마일의 슬라이더 또는 컷패스트볼이었습니다. 그 쪽으로만 들어가면 주심의 손도 자동으로 올라갔습니다. 덕분에 2회까지 무려 47개였던 투구수도 3, 4회 합쳐 23개로 크게 줄어들었습니다. 5회엔 선두 8번 타자 자시 바필드도 간단히 초구에 3루 땅볼로 처리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부터 백차승은 쉬운 길로의 유혹에 빠져들고 말았습니다. 9번부터 2번 타자에게 내리 3연속 안타를 맞고 순식간에 만루. 안타는 모두 2구째였고, 그 중 2안타는 성급하기 짝이 없었던 한복판 패스트볼이었습니다. 3번타자 케이시 블레이크를 유격수 땅볼로 유도, 홈에서 3루주자를 횡사시켜 한숨을 돌리는 듯했습니다. 계속해서 2사 만루 .
후속 5번 자니 페랄타에게 투원서 86마일 슬라이더로 다시 좌중간 적시타를 맞고 1점을 더 내준 백차승은 6회에도 선두 타자를 78마일 커브로 중견수 플라이로 요리했습니다.
하지만 이 땐 투구수가 100개를 넘기면서 한계를 드러냈습 니다. 8번 바필드에게 마음 먹고 던진 변화구들이 모두 파울로 커트되더니 투투서 7구째 패스트볼로 좌전 안타를 맞고, 9번 켈리 쇼파치에게도 투스트라이크서 91마일 패스트볼이 가운데로 몰려 우중간 2루타가 돼 4점째를 내주고 끝내 강판됐습니다.
느린 그림에서 나타난 백차승의 모습은 왼쪽 어깨가 일찌감치 열려 릴리스 포인트도 빨라지면서 투구밸런스가 완전히 무너져 팔로만 던지는 배팅볼이었습니다. 구원 투수가 적시타를 맞아 자책점만 5점으로 불어났습니다.
'내가 쉬우면 상대도 쉽고, 내가 힘들면 상대도 그만큼 힘들다'는 승부의 미학, 백차승이 두고두고 곱씹어야 할 대목이 아닐 수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