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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기택은 호적상 1943년 4월 2일생이지만 실제로는 1939년생이다. 해남은 오기택의 고향이다. 고향 후배들이 선배의 이름을 내건 가요제를 만들어 2007년부터 매년 ‘오기택 가요제’가 열리고 있다. 2018년에는 고향인 전남 해남에 ‘오기택 노래비’도 만들어졌다.
오기택은 고등학교 때 상경해 성동공고 기계과를 졸업하고 당시 가수 등용문이던 동화예술학원에 입학했다. 오기택은 동화예술학원 재학 중이던 1961년 12월 제1회 KBS 직장인 콩쿠르에 동화백화점 대표로 출전해 1등을 차지하면서 이름을 알렸다.
1962년 데뷔하자마자 ‘영등포의 밤’으로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파산 직전에 있던 레코드사는 오기택을 데뷔시키며 기사회생했을 정도다. ‘영등포의 밤’은 산업 현장에서 고단한 삶을 이어가던 당시 서민의 꿈과 애환이 담긴 노래다. 1966년에는 동명의 영화로도 제작됐다. 1963년 4월 해병대에 입대해 군 복무를 마친 후에도 ‘고향무정’을 비롯해 ‘아빠의 청춘’, ‘남산 블루스’, ‘충청도 아줌마’, ‘비 내리는 판문점’ 등을 잇달아 히트시키며 1960년대를 주름잡았다.
한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DJ가 잘못된 정보를 이야기하면서 위기를 맞기도 했다. 당시 볼링에 빠져 워커힐호텔에 볼링 연습을 하러 다닐 때였는데 DJ가 오기택이 노름에 빠져 호텔 카지노에 다니는 사실이 알려져 더 이상 그의 노래를 틀지 못한다고 라디오에서 이야기했다. 찻집에서 해당 프로그램 PD를 만났는데 상황이 해결되기는커녕 악화됐다. 이후 방송활동이 올스톱됐다. 1960년대 중반의 일이다.
1980~1982년에는 사단법인 한국연예협회 제10대 가수분과위원장을 맡았다. 회원들의 밤무대 출연료와 지방 쇼 출연료의 문제점을 들추고 방송사들의 TV, 라디오 출연료 현실화를 요구했다. 출연료 인상률 150%에 합의를 이끌어냈다. 오기택은 과거 이데일리와 진행한 인터뷰에서 “10일 만에 협상을 타결했는데 실질적인 성과는 200% 이상이었다”며 “이후 30여년 동안 더 이상 회원들에 대한 방송사의 처우가 개선되지 않고 있는 것 같다”며 안타까운 마음을 드러내기도 했다.
오기택은 골프광으로도 유명세를 떨쳤다. 90년대 초반 중매를 통해 만난 여성이 있었지만, 시간만 나면 골프를 치러 다니는 바람에 사랑의 결실을 맺지 못하기도 했다.
고인은 1997년 1월 추자도 옆 무인도 염섬으로 낚시를 갔다가 뇌출혈이 일어나 119에 의해 구조돼 뇌수술을 받았다. 이후 지병으로 치료를 받다 최근 증세가 악화해 유명을 달리한 것으로 알려졌다.
평생 미혼으로 지낸 고인은 생전 자신의 전 재산을 고향 전남 해남고에 장학금으로 기부하겠다는 뜻을 밝힌 것으로 전해졌다.
빈소는 26일께 서울 한강성심병원에 차려질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