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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T의 ‘캔디’·‘행복’, UP의 ‘1024’·‘뿌요뿌요’·‘바다’, 태사자의 ‘도’, 최창민의 ‘짱’, 사준의 ‘메모리즈’ 등이 그의 손에서 나왔다. 그가 중·고등학교 시절 쓴 곡들이다. 지난해 인기를 끈 tvN ‘응답하라 1997’에서 흘러나온 추억의 명곡 절반 이상이 그의 작품이다.
“어휴~ 창피하네요. 그 수식어는 이제 좀…. 수많은 대형기획사와 제작자가 뭉칫돈을 들고 찾아오긴 했었죠.” 그를 최근 반포동 작업실에서 만났다. 일명 ‘박찬호 수염’이 그의 트레이드마크다. 그는 “어렸을 때 나이 들어 보이고 싶어 기른 건데 이젠 깎으면 어색하다”며 멋쩍게 웃었다.
1999년 최창민의 2집(‘그녀의 뒤엔 항상 내가 있었다’)에 참여한 이후 그는 가요계에서 종적을 감췄다. 제작자로 나섰던 그가 소속 가수와 전속계약 분쟁에 휘말리면서부터다. 그는 관련 재판에서 승소했지만 충격이 컸다.
“딱히 숨어지낸 건 아닌데 마치 제가 사업에 실패해 잠적한 것처럼 소문이 났더라고요. 상처를 받이 받긴 했죠. 법적 분쟁으로 넋 놓고 있는 기간 음악 트렌드도 순식간에 변했고, 이 상태에서 곡을 쓰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뒷말이 무성했다. 한때 ‘잘 나가던’ 그가 폐인이 됐다는 이야기는 투병설, 심지어 조직폭력배에 의한 사망설로까지 확산했다. “2001년쯤인가 광주 작업실로 건달 열댓 명이 찾아왔어요. 모 회장의 뒤를 봐주고 있는 사람들이라면서 그 회사 아이돌 그룹을 맡으라고 저를 겁박하더라고요. 사흘 동안 잠도 안 자고 버텼죠. 죽는 줄 알았지만 결국 제가 이겼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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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본래 가수가 꿈이었다. SM엔터테인먼트가 그에게 먼저 제의한 건 작곡가의 삶이 아닌 H.O.T 멤버였다. 1994년 겨울이었다. 그는 이미 작곡해 둔 곡 ‘캔디’를 조용히 건네는 것만으로 대신했다. 누구에게 휘둘리지 않은 채 자신만의 음악을 하고 싶었다. “후회는 없었는데 솔직히 지금은 조금 아쉬워요. 하하.”
장 대표는 “H.O.T 멤버들과 함께 했던 그때가 행복했다”고 추억했다. SM엔터테인먼트가 처음부터 대형기획사는 아니었다. “녹음실에 방음 시설은커녕 문도 잘 안 닫혔어요. 푸대 자루를 뒤집어쓰고 녹음했죠. 멤버들 모두 정말 음악과 연습밖에 모르던 시절이었어요.”
입가에 살짝 미소를 띠는 그의 얼굴에 빛이 났다. 잘 생긴 외모다. 탄탄한 음악적 실력까지 갖춘 그는 그룹 ‘루팡’(1997년), ‘동자’(1998년)를 결성해 무대에도 섰지만 주목받지 못했다. “가수로서는 운이 없었다.” 주변의 시기와 이간질이 많았다는 게 그의 말이다. “무서운 놈이다. 언제 뒤통수 칠지 모르니 조심하라”고. 귀가 얇았던 그의 전 소속사 대표는 ‘트로트 가수를 시켜 가요계에서 매장하겠다’고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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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가 현실과 타협하기는 더 어려웠다. 부담도 컸다. 어느 순간 대중과 호흡하고 즐겼던 음악이 홈런(빅 히트)을 치기 위한 작업으로 바뀌었다. 작곡가에 대한 음악적 존중 없이 기존 히트곡과 비슷한 스타일만을 반복해 요구하는 제작자들의 세태에도 염증을 느꼈다. 대놓고 표절을 부추기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혹자에게 그는 외곬로 비친다. 그는 요즘 흔한 공동 작곡에 대한 생각도 부정적이다. “분업화의 장점도 있겠으나 그러다 보면 점점 일정 영역에 있어 남에게 의존하게 돼요. 타성에 젖고 나태해지는 거죠. 그러면 펜(작곡)을 내려놓아야해요.” 그는 실용음악과 교수직도 수차례 거절했다. “내가 아는 지식으로는 3주면 끝날 강의를 3년으로 늘리는 건 사기 아닌가요?”
철저한 원칙주의자인 그의 음악적 행보는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그간 알려지진 않았지만 그는 게임과 독립영화 음악 제작에 꾸준히 참여해왔다. 최근에는 신인 여성 가수 ‘소원’을 만나 오랜만에 신곡 ‘너를 보다’를 대중 앞에 내놨다. 대중가요는 무려 13년만이다.
“잘못하면 ‘한물갔구나’ 하실 분도 있을지 모르겠네요. 홈런도 아니고 역전 안타가 아니어도 좋아요. 제 심장은 아직 뛰고 있거든요. 그 두근거림이 다른 이에게도 전해지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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