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러블리즈 케이가 한 손에 꽃을 든 채 카메라를 향해 다가서고 있다.(사진=SB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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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일리 스타in 김은구 기자] 최근 남산 N서울타워 옆 광장에 작은 무대가 마련됐다. 초저녁이었지만 사람들 입에서는 하얀 입김이 나왔다. 초겨울 제법 차가운 산바람을 뚫고 음악이 들려왔다. 서울의 야경을 즐기고, 또 연인과 데이트를 하던 모습의 사람들 150여명이 무대 주위로 모여들었다. 음악이 클라이막스에 이르면서 사람들의 반응도 뜨거워졌다. 소리를 지르고 몸을 흔드는 사람도 있었다. 야외 광장이 보이는 N서울타워 2층에서 현수막을 들고 환호하는 사람들의 모습도 보였다. 현수막에는 ‘당신의 목소리를 응원합니다. 파이팅’이라는 문구가 적혔다.
관객을 특정하지 않고 진행하는 버스킹 공연의 한 장면이었다. 그러나 무대 위에 있는 것은 가수가 아니었다. 카메라를 고정시키는 삼각대였다. 그 위에 있는 것은 일반적으로 보던 카메라가 아니었다. 원통 형태에 6개의 렌즈가 박혀 전후좌우는 물론 위아래까지 전방위를 커버하는 VR 카메라였다. SBS가 노래방 기기 업체 금영그룹과 공동으로 준비하는 VR 노래방 서비스 ‘케이팝 VR존’에 사용할 영상을 촬영하는 현장이었다.
| (사진=SB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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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살아있는 아임이가 있어요.”
연출을 맡은 배성우 SBS PD는 출연진에게 카메라를 가리키며 수차례 강조했다. ‘아임(I’m)’은 제작진이 카메라에 붙인 이름이다. ‘나’라는 의미로 영상의 주인공 역할이 카메라였다. 배성우 PD는 “카메라를 의인화해서 출연자들이 카메라를 사람으로 인식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150여명의 보조출연자들은 사람이 아닌 카메라를 상대로 연기를 했다. 노래가 끝날 무렵 보조 출연자들을 뚫고 러블리즈 케이가 무대 앞으로 나아갔다. 케이는 손에 들고 있던 꽃을 ‘아임’에게 건넸다. 영상 속 주인공에게 버스킹의 성공적인 마무리를 축하하는 의미로 케이가 전하는 꽃이었다.
드라마, 영화에서 주·조연을 맡는 배우들도 상대가 카메라에 잡히지 않고 자신만 클로즈업될 때 카메라만 보고 연기를 하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대부분이 상대 배우가 있어야 자연스러운 연기가 나온다고 말한다. 클로즈업 촬영 때도 앞에 있어주기를 마다않는 상대 배우에게 감사를 전하기도 한다. 이날 보조출연자들과 케이의 연기가 쉽지 않았다는 것은 충분히 짐작이 갔다. 관계자는 “앞서 몇차례 촬영이 진행됐다”며 “보조출연자들이 VR 영상 촬영방식에 익숙하지 않아 초반 20여 명의 등장이 필요한 영상을 먼저 촬영했다. 그 출연자들에게 VR 영상 촬영의 특수성을 설명한 다음 40명, 80명으로 출연자 규모가 큰 영상들을 촬영하면서 기존 출연자들에게도 새 출연자들에게 연기 방식을 설명해주도록 했다”고 말했다. 이렇게 완성된 영상으로 사용자들은 VR 노래방에서 VR HMD(머리 착용 디스플레이)를 통해 자신이 버스킹 무대에서 공연을 하는 가상현실 속에서 노래를 부르게 된다.
| (사진=SB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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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촬영된 장면은 발라드와 댄스곡 두가지 버전이었다. 출연자들은 각각의 버전을 1시간30여 분씩 리허설을 한 뒤 촬영을 했다. 본 촬영은 각각 3회씩으로 마무리됐다. 출연자들은 익숙하지 않은 촬영상황이었을 텐데도 무리 없이 연기를 소화했다. 케이도 마찬가지였다. 노래 한곡의 영상이다 보니 길어야 4~5분 분량이어서 수월한 촬영이었다.
촬영이 한번의 ‘컷’ 없이 진행된 것도 인상적이었다. 카메라를 중심으로 전방향의 영상을 한꺼번에 모두 담아야 하는 VR 카메라의 특성 때문이다. VR 영상은 편집도 불가능하다. 촬영 스태프들도 카메라 렌즈 밖으로 피할 수 없어 보조출연자들에 섞여 버스킹 공연 스태프로 연기에 동참했다.
이날 촬영은 주인공이 ‘나’라는 점에서 상업적인 성과가 주목된다. VR은 4차 산업혁명의 한 장르로 꼽혀왔지만 관광지 홍보영상이나 게임 등에 활용되는 게 전부였다. 드라마 등에도 접목이 됐지만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
| 보조출연자들이 VR 카메라가 놓인 버스킹 무대를 보며 흥겨워하는 연기를 하고 있다.(사진=SB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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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성우 PD는 “기존 VR이 ‘가상’에 초점을 맞췄다면 이번 서비스에서는 ‘현실’이 초점”이라며 “카메라와 시청자(이용자)의 화법이 달라졌다. 기존에는 이용자가 관찰자 입장이었지만 VR 노래방에서는 이용자가 주인공이 된다”고 차이점을 설명했다. SBS ‘오! 마이 베이비’, ‘스타킹’. ‘있다! 없다?’ 등을 연출한 배성우 PD는 그 동안 VR 드라마 등 VR을 활용한 다양한 시도를 해왔다. VR 노래방 영상은 배성우 PD가 VR 노하우를 집대성한 결과물이다.
러블리즈와 골든차일드 등 인기 아이돌 그룹들이 소속된 울림엔터테인먼트가 프로젝트에 동참한 점은 성공 가능성을 더욱 높인다는 평가다. 스타와 팬덤의 결집력은 대중이 낯선 시도에 도전하도록 만드는 힘이 된다는 점에서다. SBS는 VR노래방 서비스를 ‘케이팝 VR존’이라는 명칭으로 오는 크리스마스에 서울 SBS 목동 사옥과 서울역에서 시범 운영한 뒤 내년 3월 전국 ‘케이팝 VR존’을 통해 운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