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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근 SK 감독이 지바 롯데 코치를 하고 있을 때 일이다. 이승엽의 근황을 취재하던 중 자연스럽게 한국 야구쪽으로 이야기가 옮겨 갔다.
그러다 김 감독이 벌컥 화를 냈다. "그정도 선수가 최고란 말인가. 큰일이다. 한국 야구가 그만큼 약해졌다는 뜻이다." 김 감독이 말한 '그정도 선수'란 롯데 이대호였다.
2004년까지 한국야구를 본 김 감독에게 이대호는 '덩치만 큰 공갈포'였다. 그러나 2006년을 기점으로 이대호는 달라졌고 그 모습을 보지 못한 김 감독에게 이대호의 활약은 믿기지 않는 일이었다.
그리고 2007년. 한국에 돌아와 SK 감독을 맡은 김성근 감독은 이대호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상대하기 가장 껄끄러운 타자다. 이대호를 어떻게 상대하느냐에 따라 롯데전 승부가 달라진다."
김 감독에게 물었다. "이대호의 무엇이 달라진 겁니까." 내심 꽤 멋들어진 기술적 분석을 기대했다. 그러나 김 감독의 답은 달랐다.
"타석에서 존재감이 달라졌다. '롯데의 중심은 이대호'라는 책임감이 느껴진다. 이전까진 타석에서 약점만 보였는데 이젠 정말 꽉 찬 느낌을 준다."
이대호만의 아우라에 마음을 빼앗긴 것은 비단 김성근 감독 만이 아니다. 김경문 두산 감독 겸 베이징 올림픽 대표팀 감독 역시 이대호의 그 무엇인가에 주목하고 있다.
김 감독은 대표팀 1루수 자리에 이승엽과 함께 이대호를 낙점하며 "이대호의 눈빛은 남다른데가 있다. 특히 중심타자로서 몸에 맞고라도 나가려는 그 정신이 좋았다"고 말한 바 있다.
얼마 전까지의 이대호는 달랐다. 타석에선 온통 구멍을 드러낸 옛 모습으로 돌아온 느낌이었다. 그의 추락과 함께 롯데의 성적도 내리막길을 걸었다.
곧바로 이대호에게 비난이 쏟아졌다. 팀 성적은 물론 대표팀 선정에 문제가 있다는 지적까지 나왔다.
두산 4번타자 김동주는 그런 이대호에 대해 "대호는 괜찮다고 하지만 진심일 리 없다. 나도 비슷한 경험을 해봐서 안다. 오히려 팀에 대한 지나친 책임감을 내려놓을 때 더 큰 일을 해낼 수 있다"며 안타까움을 표시했었다. 이대호의 부진은 비단 기술적인 문제만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롯데의 성적과 이대호는 같은 선상에 서 있다. 벗어나려고 해도 벗어날 수 없는 숙명이 돼 버렸다. 그 가혹한 운명이 억울할런지는 몰라도 이젠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요즈음의 이대호는 한결 편안해졌다. 조금씩 달라지고 있다. 이대호의 방망이에서 다시 안타가 나오기 시작했고 그의 표정에서도 여유가 보이고 있다. 그저 타석에 선 것 만으로도 무언가 일을 낼 것 같던 특유의 분위기도 조금씩 찾아가고 있는 느낌이다.
피할 수 없다면 즐기는 수 밖에 없다. 이대호의 가슴 속에서 두려움이 사라지는 날, 롯데의 가을 꿈은 한층 더 영글어 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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