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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사전제작’은 말 그대로 방송 시작 전에 제작을 완료하는 시스템이다. 미국 등에서 정착이 돼 있지만 국내에서는 그렇지 못하다. 드라마 방송이 시작되고 어느 정도 지나면 제작진이 일주일 간 주 2회 각각 70분 분량의 촬영과 편집을 빠듯하게 마치고 간신히 방송을 한다. 이 같은 제작 환경은 쪽대본이 남발하는 배경이 됐고 한류의 선봉 콘텐츠인 드라마에 ‘실시간 드라마’, 배우와 스태프의 권리가 무시되는 ‘밤샘 촬영’ 등의 오명을 덧씌웠다.
생방송 시스템 만연…사전제작이 정착 못한 이유
유행은 날이 갈수록 빠르게 변한다. 국내 시청자들은 유행의 변화에 유독 민감하다. 사전제작을 한 뒤 방송 시점이 되면 유행은 이미 변해버렸을 수 있다. 국내 제작진은 드라마가 방송되면서 시청자 반응을 살펴보고 이어지는 스토리, 장면 등에 이를 반영하는 작업 스타일에 능숙하다. 애초 기획 당시와 드라마의 스토리, 결말이 달라지기도 하고 시청자들에게 호응을 더는 내용, 배우의 비중이 늘어나기도 한다. 드라마 ‘대장금’의 전반부 양미경이 연기한 대장금의 스승 한상궁 캐릭터가 인기를 끌면서 비중이 주인공 급으로 커진 게 대표적인 예다. 사전제작 시스템에선 이 같은 조절(?)이 불가능하다.
그러다 보니 ‘생방송’을 방불케 하는 제작 시스템은 한국 드라마를 상징하는 특징이 됐다. 지난 2006년 방송된 ‘늑대’는 출연진이 초반부터 이어진 밤샘촬영으로 피로가 쌓인 상태에서 촬영 중 교통사고를 당해 방송 3회 만에 막을 내렸다. 사극 ‘바람의 화원’도 촬영 중 주인공 문근영의 코뼈 골절상으로 방송이 결방됐는데 이 역시 출연진의 피로도가 높아 미리 짜인 합을 제대로 맞추지 못한 탓이라고 전해졌다.
中 투자·방송 위해 사전제작 필요성↑
심의에는 최소 2~3개월의 시간이 걸리는 것으로 전해진다. 촬영에 편집까지 마친 완성된 드라마를 심의 기관에 넘긴다. 1회 60분 분량의 20부작 드라마라면, 총 1200분 분량의 전체 편집본을 제출해야 심의 작업이 시작된다. 현재 촬영을 마친 ‘태양의 후예’는 이 같은 절차를 밟아 오는 2월 말께 한중 양국 동시 방송을 추진 중이다. 중국 최고 한류스타로 꼽히는 이영애와 송승헌의 힘으로 홍콩 엠퍼러 그룹으로부터 100억원 이상을 투자 받은 ‘사임당 her story’는 현재 촬영에 한창이다. 제작사 그룹에이트 측은 오는 3월께 촬영을 마치고, 3개월 이상의 심의 기간을 거쳐 상반기 즈음 방송할 계획이다. ‘보보경심:려’, ‘화랑’도 이 같은 절차를 고려해 사전 촬영 작업과 심의를 위한 준비 작업을 병행할 예정이다. ‘화랑’은 중국판 넷플릭스로 알려진 유력 미디어그룹 LETV에 최고 수준의 금액으로 판권이 이미 판매돼 완성도 면에서 더 힘을 실을 수 있게 됐다.
관건은 ‘성적표’다. 지금까지 국내에서 사전제작 드라마로 만족할 만한 성적을 거둔 작품은 몇 편 되지 않는다. 손예진, 감우성 주연으로 2006년 방송된 ‘연애시대’ 등이 기억에 남는 정도다. 시청률이 좋지 않아 ‘사전제작 드라마는 망한다’라는 인식이 생긴 분위기도 아쉬운 대목으로 남는다. 한국전쟁을 배경으로 130억원의 제작비가 투입된 MBC ‘로드 넘버원’은 사전제작 시스템을 표방해 화제가 됐다. 당시 같은 시간대 편성된 KBS2 ‘제빵왕 김탁구’의 ‘50% 시청률’에 좌절해 ‘5% 꼬리표’를 남겼다. 배경렬 레디차이나 대표는 “국내에서도 드라마 사전제작의 필요성이 제기된 게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지만 실효성에서는 늘 물음표가 붙었다”며 “사전제작 시스템에 맞는 제작진의 마인드 변화가 필요하다. 사전제작 시스템으로도 좋은 드라마가 나올 수 있다는 성공사례도 뒷받침이 돼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