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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일리 SPN 정철우기자] 먼저 널리 알려진 이야기 하나.
컵에 물이 반쯤 차 있다. 이에 대한 반응은 크게 두가지 성향으로 나뉘는데, 이것을 보고 "물이 반 밖에 없다"고 말하는 사람과 "물이 반이나 차 있다"고 하는 사람이 있다.
같은 사물을 보고 비관적으로 판단하느냐, 긍정적으로 생각하느냐에 따라 그 결과가 달라질 수 있다는 뜻이다.
SK 투수 정대현은 좀처럼 표정으로 생각을 읽어내기 힘든 스타일이다. 마운드에서건 운동장 밖에서건 늘 덤덤하게 같은 얼굴을 하고 있다.
자신의 공 하나에 팀의 승리가 날아갈 수도 있는 마무리 투수. 실패가 두려운 적은 없었을지 궁금했다. 특히 세월이 흘러 힘이 떨어졌을 때, 최고의 자리에서 내려가야 할 때에 대한 걱정은 없을까.
정대현은 무겁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시작을 밑바닥에서 했었기 때문에 두려울 것이 없다"는 것이었다.
정대현은 2000년 시드니 올림픽의 영웅이었다. 경희대 시절 깜짝 발탁돼 미국,쿠바 등 강호들을 상대로 최고의 피칭을 했다. 이듬해 정대현은 3억5,000만원의 계약금을 받고 SK에 입단했다.
그의 첫 보직은 패전 처리였다. 지는 경기에 나서 팀 투수력의 손실이나 막아주는 일을 맡았다. 팀이 졌는데 신이 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잘 던지고 내려와도 격려 한번 받기 힘들었다.
정대현은 더 이를 악물었다. 묵묵히 자신이 빛을 낼 수 있는 시간을 참고 기다렸고, 오래지 않아 진가가 발휘됐다. 7년여가 흐른 지금, 그는 팀에서 없어선 안될 선수가 됐다.
그의 말을 듣다보니 문득 이런 의문이 들었다. '최악의 상황을 겪어봤으니 그 서러움을 다시 당하게될까 더욱 두렵진 않을까.' 다신 그런 삶을 반복하고 싶지 않을테니 말이다.
그러나 정대현은 이번에도 아니라고 했다. 모두의 손가락질을 받던 그 때도 자기가 할 수 있는 것만 열심히 하면 길이 열렸기 때문이다. "언젠가는 내려가야 할 때가 오겠지만 그때 상황에 따라 최선을 다하면 또 그런대로 살 수 있다"고 말했다.
지극히 평범한 듯 하지만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추락에 대한 두려움은 선수 생명이 짧은 야구 선수들에게 큰 짐이 되곤 하기 때문이다.
서용빈은 밑바닥부터 올라 온 선수일 수록 더욱 그렇다고 했다. 다시 그때처럼 돌아가는 것이 너무도 싫기 때문이다.
정대현은 다르다. 물론 아직 끝을 생각 할 나이는 아니지만 끊임없이 변하고 진화하려 노력한다. 느린 직구를 빠르게 보일 수 있는 방법을 찾고 또 도전한다.
추락에 대한 두려움? 없다고 했다. 한번 겪어본 일, 또 못해볼 것 없다는 것이다. 마무리 정대현의 진짜 힘이 무엇인지 조금은 알 수 있을 듯 했다.
그는 우리에게 이렇게 묻고 있는지 모른다. "지금 당신 앞에 놓인 '인생의 잔'에는 물이 얼마나 차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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