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철우의 1S1B]추락이 두렵지 않은 남자 이야기

  • 등록 2008-04-18 오전 11:01:04

    수정 2008-04-18 오전 11:06:00

▲ 정대현 (제공=SK와이번스)

[이데일리 SPN 정철우기자] 먼저 널리 알려진 이야기 하나.

컵에 물이 반쯤 차 있다. 이에 대한 반응은 크게 두가지 성향으로 나뉘는데, 이것을 보고 "물이 반 밖에 없다"고 말하는 사람과 "물이 반이나 차 있다"고 하는 사람이 있다.

같은 사물을 보고 비관적으로 판단하느냐, 긍정적으로 생각하느냐에 따라 그 결과가 달라질 수 있다는 뜻이다.

SK 투수 정대현은 좀처럼 표정으로 생각을 읽어내기 힘든 스타일이다. 마운드에서건 운동장 밖에서건 늘 덤덤하게 같은 얼굴을 하고 있다.

자신의 공 하나에 팀의 승리가 날아갈 수도 있는 마무리 투수. 실패가 두려운 적은 없었을지 궁금했다. 특히 세월이 흘러 힘이 떨어졌을 때, 최고의 자리에서 내려가야 할 때에 대한 걱정은 없을까.

정대현은 무겁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시작을 밑바닥에서 했었기 때문에 두려울 것이 없다"는 것이었다.

정대현은 2000년 시드니 올림픽의 영웅이었다. 경희대 시절 깜짝 발탁돼 미국,쿠바 등 강호들을 상대로 최고의 피칭을 했다. 이듬해 정대현은 3억5,000만원의 계약금을 받고 SK에 입단했다.

그러나 프로에서의 삶은 고단했다. 주위에선 기껏해야 130km가 조금 넘는 그의 공은 한국 프로야구에선 통하지 않을거라 수근거렸다. 몇경기 헤매자 "그것 보라"며 손가락질이 쏟아졌다.

그의 첫 보직은 패전 처리였다. 지는 경기에 나서 팀 투수력의 손실이나 막아주는 일을 맡았다. 팀이 졌는데 신이 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잘 던지고 내려와도 격려 한번 받기 힘들었다.

정대현은 더 이를 악물었다. 묵묵히 자신이 빛을 낼 수 있는 시간을 참고 기다렸고, 오래지 않아 진가가 발휘됐다. 7년여가 흐른 지금, 그는 팀에서 없어선 안될 선수가 됐다.

그의 말을 듣다보니 문득 이런 의문이 들었다. '최악의 상황을 겪어봤으니 그 서러움을 다시 당하게될까 더욱 두렵진 않을까.' 다신 그런 삶을 반복하고 싶지 않을테니 말이다.

그러나 정대현은 이번에도 아니라고 했다. 모두의 손가락질을 받던 그 때도 자기가 할 수 있는 것만 열심히 하면 길이 열렸기 때문이다. "언젠가는 내려가야 할 때가 오겠지만 그때 상황에 따라 최선을 다하면 또 그런대로 살 수 있다"고 말했다.

지극히 평범한 듯 하지만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추락에 대한 두려움은 선수 생명이 짧은 야구 선수들에게 큰 짐이 되곤 하기 때문이다.

코치 연수중인 LG 서용빈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은퇴할 즈음이 되면 모두 똑같은 고민을 한다. 한창때와는 분명 다른 야구를 해야 한다. 하지만 변하는 것이 두려워 그러질 못한다. 자칫 그동안 했던 것 조차 잃어버릴까 걱정이 앞선다. 실패해서 초라해지는 것이 싫기 때문이다. 결국 은퇴를 하고 난 뒤에야 그때 도전하지 못한 것을 후회하게 된다. 이건 야구를 잘한 선수나 그렇지 않은 선수나 마찬가지다."

서용빈은 밑바닥부터 올라 온 선수일 수록 더욱 그렇다고 했다. 다시 그때처럼 돌아가는 것이 너무도 싫기 때문이다.

정대현은 다르다. 물론 아직 끝을 생각 할 나이는 아니지만 끊임없이 변하고 진화하려 노력한다. 느린 직구를 빠르게 보일 수 있는 방법을 찾고 또 도전한다.

추락에 대한 두려움? 없다고 했다. 한번 겪어본 일, 또 못해볼 것 없다는 것이다. 마무리 정대현의 진짜 힘이 무엇인지 조금은 알 수 있을 듯 했다.

그는 우리에게 이렇게 묻고 있는지 모른다. "지금 당신 앞에 놓인 '인생의 잔'에는 물이 얼마나 차 있습니까."


▶ 관련기사 ◀
☞[정철우의 1S1B] 고참, 그 존재의 이유
☞[정철우의 1S1B]'대안2'였던 사나이,그리고 그의 한
☞[정철우의 1S1B] 로이스터 돌풍과 귀네슈의 2007 시즌
☞[정철우의 1S1B]이봄,캐치볼로 마음을 전해보세요
☞[정철우의 1S1B]야구장의 전봇대도 뽑아버리자

이데일리
추천 뉴스by Taboola

당신을 위한
맞춤 뉴스by Dable

소셜 댓글

많이 본 뉴스

바이오 투자 길라잡이 팜이데일리

왼쪽 오른쪽

스무살의 설레임 스냅타임

왼쪽 오른쪽

재미에 지식을 더하다 영상+

왼쪽 오른쪽

두근두근 핫포토

  • 태연, '깜찍' 좀비
  • ‘아파트’ 로제 귀국
  • "여자가 만만해?" 무슨 일
  • 여신의 등장
왼쪽 오른쪽

04517 서울시 중구 통일로 92 케이지타워 18F, 19F 이데일리

대표전화 02-3772-0114 I 이메일 webmaster@edaily.co.krI 사업자번호 107-81-75795

등록번호 서울 아 00090 I 등록일자 2005.10.25 I 회장 곽재선 I 발행·편집인 이익원 I 청소년보호책임자 고규대

ⓒ 이데일리.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