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예기자석] Jose, 그가 내게 건네 준 마지막 싸인볼(下)

  • 등록 2007-06-07 오전 11:49:24

    수정 2007-06-07 오전 11:52:44


[이데일리 SPN 고남욱 명예기자] 양상문 전 롯데 자이언츠 감독(46, 현 LG 트윈스 코치)의 재임기간이던 2004년, 2005년 호세의 영입을 그토록 바랐지만, 롯데의 문제는 호세의 가세가 아니었다.

호세만 바라보고 있었지 국내 타자들로 구성된 타순을 만들어내지 못했다는 지적은 이때부터 날아들었다. 호세가 없어도 되는 타선, 호세 한명으로 끝나는 타선이 아닌, 결속력 있는 타선은 반드시 필요했다. 호세는 매년 나이를 먹지 않는, 아니 나이를 먹어도 노화의 기미를 보이지 않는, 신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퍼즐 맞추기는 다시 시작되었다.

2006년 라이온 잭슨(36)과 킷 펠로우(34)와의 재계약에 대한 부분에서 롯데 자이언츠 팬들은 다른 프런트의 의견을 떠나 두명을 새로 뽑느니, 기존의 펠로우와 새로운 한명으로 가자고 입을 모은다.

그러나 결과는 ‘라선배’로 불리던 라이온과 펠로우 모두 재계약에 실패. 팬들로서는 어떤 선수를 데려오기에 그럴까라고 생각할 수 밖에 없었고, 걱정은 나날이 늘어 갔다. 그리고 며칠 후, 예상하지 못한 선수가 다시 돌아온다. 그리고 그 결과에 팬들을 포함한 야구 관계자들도 술렁거렸다. ‘펠릭스 호세’. 호세가 다시 돌아왔던 것이다.

‘펠릭스 호세’는 한국에 다시 오기 전 이중 계약 문제 등으로 시끄러웠다. 롯데 구단은 2001년 김명성 감독의 갑작스런 타계와 호세의 돌출 행동으로 엄청난 홍역을 앓았다.

‘다시 한국으로 돌아오겠다.’는 그의 인터뷰는 립 서비스라고 받아 들였고, 많은 팀들은 그가 다시 돌아오는 것에 대해 알레르기 반응을 보였다.

‘한국 프로야구를 우습게 본다’는 이유와 ‘호세가 존재하는 롯데에 대한 철저한 견제’가 호세 재입성의 걸림돌이었다. 롯데 팬들은 호세가 다시 한국에 오지 못할 것이라고 여겼다. (2002년 일부 구단의 반대로 징계를 풀지 못했지만 2003년 열린 회의에서는 별 다른 이견 없이 호세의 복귀를 허용했다.)

호세는 애리조나 다이아몬드 백스, 맥시칸리그에서의 생활을 청산하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팬들 중 일부는 호세에 대한 반감을 가졌을 수 있지만 대부분 예전의 아쉬운 감정은 걷어내고 그를 반겼다.

나이가 들어 이전부터 부족하다고 느꼈던 외야수비가 더욱 허술해진 모습이었지만, 호세가 왔다는 것만으로도 프로야구 흥행의 한 키워드가 될 수 있었다. 그리고 롯데 팬들은 과거 마해영, 조경환이 그랬던 것처럼 이대호가 호세의 도움을 받고, 성장하길 바랬다. 그리고 결과는 팬들의 예상을 뒤집었다.

아수라 백작

호세는 항상 '사건의 현장'에 서 있곤 했다. 팀에서도 다혈질적인 부분을 보여주었던 것도 사실이다. 2001년에 이어 2006년에는 SK 와이번스 투수 신승현(24)과 그라운드가 아닌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난투극을 벌였다.

2006년 호세의 헬멧은(그의 평소 모습을 어느정도 반영하는)‘아수라 백작’의 그것이었다. 팀 동료들의 실수로 답답해 하던 호세는 어느날 바닥에 헬멧을 집어 던져 깨트렸다. 그러나 그 헬멧을 절대 버리지 않았다.

오른쪽 부분을 테이프로 붙인 뒤 검은색 매직펜으로 색칠을 했다. 구단 직원들이 새 헬멧을 권유해도 막무가내였다. 타격이 좋을 때 착용했던 헬멧을 버리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 헬멧은 미국 현지 에이전트가 직접 구입해 전달해준 것이었다.

이런 면들만 본다면, 호세는 '트러블 메이커'의 이미지를 구축할 수도 있다. 다른 일화로 방향을 돌려본다. 2006년 그가 다시 돌아왔을 때, 가장 먼저 찾은 것은, 자신이 예전에 달던 34번 유니폼이었다.

그러나 34번 유니폼을 찾았을 때, 그 유니폼의 주인공이 바로 이용훈(30)이라는 것을 알았고, 통역을 보고 재미있다는 듯이 한번 웃으며 말했다.

“그 번호는 행운이 깃든 번호다. 내가 예전에 그 배번을 달고 그라운드에 있으면 항상 컨디션이 좋았다. 난 그 컨디션을 간직한 채 99년의 기억을 갖고, 99번을 달겠다.”
(겨울 전지훈련때) 호세는 자신의 예전 34번 배번을 달고 뛰는 선수가 좋았다. 전지훈련 장소에서도 34번의 이용훈에게, “우리 팀의 1선발이냐. 아주 공이 좋다. 힘내라.”라고 말해주며, 호탕함으로 남자답게 챙기던 이가 바로 호세였다.

호세는 롯데 팬들이 두려워 한다는 소위 ‘로나쌩’에게 홈런을 뽑아냈기에 롯데 팬들에게 더 크게 사랑받던 선수였다. 랜들(30, 두산 베어스)을 비롯한 배영수(26, 삼성 라이온즈), 박명환(30, 엘지 트윈스) 모두 호세에게 홈런의 추억을 선사한 주인공 들이다.

2006년 두산과의 잠실 경기에서 3대 0으로 지고 있을 당시, 멧 랜들을 상대로 만루 홈런을 만들기도 했던 호세. 배영수, 박명환 등에게 홈런을 치고, 덕아웃에 들어가면서 하이파이브를 하며, 팀 내 파이팅과 근성 그 이상을 불어 넣었다.

붉은 피는 그에게 항상 존재하던 것은 아니었다.

누가 뭐래도 그는 승부사 기질과 터프함이 배어났다. ‘우리 팀’ 선수가 절대 당하는 것은 참지 않았고, 자신을 포함한 롯데 팬들에게 자부심을 넣어주려고 항상 노력하던 선수가 호세였다.

그리고 이 친구는 더불어 따뜻한 마음마저 있었다. 호세는 자신을 위해서 기도해주고 성원해주는 사람들을 위해서 훈련이 끝난 뒤 잠을 설쳐가면서  싸인볼 한 박스에 사인을 마치고 잠을 청했고, 야구하기 힘든 여건의 어린 친구들에게 배트와 글러브를 나눠주기도 했다. 그것이 ‘부산 사나이’ 호세가 살아가는 방식이었고, 호세는 누가 뭐래도 젠틀맨의 이미지도 지니고 있었다.




호세에게 2006년 개막전을 앞두고 우리가 그리던 어느 순간처럼 루상을 휘저으려는 모션을 취하기에 기자들이 물었던 적이 있다. 당신은 왜 1999년에도 투수가 셋 포지션 자세에서, 안 좋은 무릎으로 도루를 하려 했는데, 지금은 더 악화 되었음에도 시도를 하느냐고 말이다. 그의 대답은 명쾌했다.

“나는 프로이자 자이언츠의 일원이다. 그리고 나는 펠릭스 호세이다, 롯데를 응원하는 사직의 팬들은 우리가 승리하기를 바란다. 나는 그 대답에 충실하고 싶을 뿐이다.”

롯데 자이언츠가 하위권에 익숙한 팀이라는 것을 알았기에, (자신이 입기 편하다고 인터뷰에서는 밝혔던) 명문 뉴욕 양키즈 유니폼 하의를 입던 호세. 팬들과 함께 하기 위해서, 디비디비딥을 하는 것도 흥미로워 했고, 푸른 올드유니폼을 받고, 아이처럼 기분 좋아했던 선수가 바로 펠릭스 호세였다. 아이들이 사인 해달라고 하면, 직접 무릎을 구부리면서 눈을 마주치고, 사인을 해 주는 멋진 모습을 보이던 구도의 영웅이었다.

타석에서 스윙을 한번 하면 호세는 까마득히 솟은 타구를 한참이나 지켜보는 세리머니를 한번씩 보여주었고, 하얀 점으로 변한 공이 외야 담장을 훌쩍 넘어 구장의 별이 된 뒤에야 호세는 천천히 다이아몬드를 돌고는 했다.

“사실 출루에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다. 안타 하나, 타점 하나를 올리는 데 집중하다 보니 저절로 따라왔다. 내가 세운 기록은 다른 한국 선수가 또 깰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나로 인하여, 승리하는 게임을 누가 깨지는 못할 것이다. 팀의 승리가 우선이다.”

2007년, 그의 뒷모습을 보았다.

호세는 자신의 치료와 재활 과정을 거치면서  인터뷰를 했다. 우선 2007년부터 마운드 높이가 13인치에서 10인치로 낮아지는 것을 무척이나 반겼다.

그리고 올해 롯데에서 안 된다면, 야구를 그만두겠다는 인터뷰 내용은 그의 비장함까지 엿볼 수 있었다. 그만큼 롯데가 자신의 마지막 팀이기를 바랐고, 재활 훈련 및 모든 훈련에 열심히 임했다.

그러나 삼국지에 나오는 황충도 세월의 흐름을 이길 수 없었듯이, 호세 또한 한국에서 자신의 마지막에 부딪혔다. 살 빼고 마운드 높이의 반사이익을 기대하는 호세를 더 이상 선수로서 볼 수 있는 시간이 줄어들까봐 팬들은 걱정했다.

그리고 호세 자신도 이때부터 조바심이 나기 시작했다고 한다. 2006년 브라이언 마이로우(31, 전 롯데 자이언츠)와 동반 퇴출 설이 나왔을 때보다 호세에게 밀려오는 긴장감은 팬들이 느끼는 그것보다 더 했을 것이라는 평이 흘러나왔다.

언론들은 그를 들쑤시기 시작했다. 심지어 존 갈(29, 전 롯데 자이언츠)과 띠동갑이 아니라, 마이로우와 띠동갑인 호세이기에 지금의 상황이 이해가 된다라는 이야기도 흘러나왔다.

그를 한국에서 마지막으로 선수로 볼 수 있었던 2007년 호세는 예전만큼 우리가 도망가면 감춰줄 수 있는 용기는 있지만, 예전의 향수를 느낄 만큼 안타까운 모습도 보였다. 타격에서 야구할 때도 힘 보다는 자신의 경험이 쌓인 요령을 택했다.

그리고 자신의 선구안을 믿었다. 만루 찬스에서 조금씩 커트하고 타임을 부르면서 밀어내기로 점수를 내기도 하고, 자신이 선두타자일 때도, 예전처럼 과도하게 스윙을 돌리지 않았다. 기다렸다. 우리가 보고 느끼던 그런 모습은 아니지만, 호세는 팬들에게 마지막까지 죽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려고 했다.

상대팀에게는 기분이 상하는 장면일 수 있지만, 코칭 스태프들이나 팬들에게는 호세가 이 만큼 노력하고 있다는 것을 온 몸으로 보여주는 장면들이었다.

2007년 힘겹게 재계약을 하고, 롯데 자이언츠에 남기 위해서 몸부림을 쳤다. 주루가 안 된다는 지적을 듣고 싶지 않아서, 누더기가 된 다리를 이끌고, 러닝을 했고, 자신의 체중을 내릴 수 있는데 까지 내렸다.

그가 2루에서 안타로 홈으로 못 들어온다고 지적하는 팬들이 없었지만, 그는 그게 항상 아쉬웠고, 팬들에게 미안했다. 파워는 나이가 들 수록 떨어지는 것 같아  메이저리그의 강타자 데이비드 오티스(보스턴)와 함께 겨울내내 개인 트레이너의 지도로 합동 훈련을 했다.

사직에서 3만의 부산갈매기들과 함께 하고 싶어서 혹여나 부상이라도 당할까봐 윈터리그에도 참가하지 않았고, 항상 자신의 제 2의 고향은 부산이라고 말하던 펠릭스 호세.

“시프트가 있으면, 다른 방향으로 타구를 보내도 되지 않나요. 당신은 타격왕 타이틀을 거머쥘 수 있는 재질을 지닌 선수 아니었나요.” 라는 물음에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것 중 하나가, 나를 위해서 시프트를 취한 선수가 있다면 내 마지막 힘을 다해 넘기는 타구를 날리는 것 일뿐이다. 지금 나의 능력에 대해서 의심하고 싶지는 않다. 그것이 내 자신이 지금 안 된다고 하는 것에 승복을 하는 것이니까. 내 몸의 한계를 내가 인정하고 싶지 않다는 것은 누구나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2007년 두산 베어스와의 경기 직전에)




2007년 5월 10일...시간이 멈추길 바랬다.

SK 와이번스와의 문학 구장에서, SK 와이번스의 야수들은 자리를 이미 잡았다. 호세의 타구가 갈 길을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운드에는 김성근 감독이 내세운 이영욱. 롯데는 '생소한 투수'에게 약하다는 지적을 또 한번 받을 위기에 처해있었다.

롯데 팬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겠다는 듯이 0-1로 스코어 보드는 반짝거렸다. 그리고 롯데의 3회 초 공격이 시작되었다. 특별히 공격다운 공격이 이루어지지 않는 상황이 연출되는 줄 알았고, 관중들은 호세가 나오자 예전처럼 '기대'가 아닌, '걱정'으로 바라 보았다.

1사 1루에서 .253이라고 전광판에 새겨진 자신의 예전 같지 않은 타율을 바라보는 호세가 타석에 들어섰다. 볼카운트 0-1에서 던진 이영욱의 139km 직구가 홈플레이트 근처에서 호세의 눈높이에 맞게 형성됐다. 호세의 당시 스윙이라면, 헛스윙이 나올 법한 스윙이었다.

"딱" 경쾌한 소리와 함께 이 공은 마운드에서 전광판으로 날아가기 시작했다. 현수막이 보였다. '호세,제발 한개만 쳐줘', '홈런 쳐 어서!!!'라는 내용을 담고 있는 플래카드와 현수막이 보였다. 비거리 125m짜리 우중월 홈런. 올 시즌 23경기만의 첫 홈런이었다. 마수걸이 홈런에 팬들은 울었다. 문학 구장을 찾은 롯데 팬들, TV로 시청하던 팬들, 모두 하나가 되어 울었다.

이 홈런을 친 선수가 그렇게 대단했다. 최동원이 마운드에서 마지막 아웃 카운트를 잡을 때만큼이나 대단했는지 모르지만, 팬들이 눈물을 흘리게 했다. 호세가 부활하는 줄 알았다. 그리고 다시는 그가 고전하지 않을 줄 알았다.

그러나 이 홈런은 그의 마지막 타석에서의 홈런이었다. 마수걸이 홈런이 작별 홈런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그가 들어섰던 타석은 바로 그가 즐겨찾던 4번타석. 호세는 바로 다음날, 퇴출 통보를 받았다. 타율 0.256·1홈런·12타점.

어찌보면 의심의 여지가 없는 퇴출 성적이었고, 그 선수가 호세이기에 넘어 갈 수 있었던 성적표이기도 했다. 이날 호세가 인천 밤하늘에 쏘아 올린 홈런포는 역대 최고령 홈런(42세 8일)으로 남았으며, 호세의 최고령 출장기록도 이날로 마침표를 찍게 됐다.

그렇게 호세의 한국시계는 멈췄고 출장기록도 이제는 명이 다했다. 문학에서의 그 날 승리는 기분 좋았지만, 호세가 그렇게 떠날 줄도 몰랐다.

2007년 5월 11일...울었다.

급하게 롯데 팬들은 호세의 웨이버 공시 소식을 듣고, 2007년 5월 11일 잠실 구장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호세의 자리는 없었다. 호세와 연관된 지인들에게 뒤늦게 들은 이야기지만, 그 또한 짐을 꾸리면서 눈물을 보였다고 한다.

앞에서는 "야구는 비즈니스이다. 내 성적에 불만이 많아서, 구단에 서운한 감정이 없다. 그리고 최고의 팬들을 만날 수 있는 동안 나는 행복했다.“라고 말했지만, 부산으로 이동하는 차안에서, 자신에 대해서 화도 내면서, 사직을 떠나는 그것에 따른 자책성 눈물과 팬들을 떠나는 아쉬움에 눈물을 보였다고 한다.

이제 당신이 주로 이름을 올리던 4번과 5번 자리에는 더 이상 당신의 이름이 존재하지 않지만, 롯데 자이언츠 팬들은 그 자리가 이 날 내린 비에 젖을까봐 주황색 비닐봉투로 테두리를 감싸 안을 것이다. 당신의 발걸음을 보고 싶어, 공항까지 가서, 당신에게 울음으로밖에 하소연 하지 못하는 팬들이지만, 호세 당신을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기억할 것이다.

팬들은 호세가 기록의 사나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기록으로만 답해주던 선수를 찾는다면 호세는 그 답이 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팬들의 아픔‘을 다독여줄 수 있던 선수를 찾는다면, 호세였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고 회자된다. 그와 팬들은 알고 있다. 그들은 비즈니스가 아닌 가족이었다고.




“호세를 보면, 절대 자신이 쓰러질 정도로 아파보여도, 내색을 안 한다. 오기가 생겨서, 다시 한번 쳐 보라고 공을 뿌리면, 호세는 그 공을 걷어 내곤 했다. 지치는 것은 투수이고, 그라운드에는 호세만 남더라. 개인적으로 호세가 제일 상대하기 힘들었다.”-2007년 현대 유니콘즈 투수들, 현대 유니콘즈 투수 좌완 이현승이 롯데와의 경기 직전에-

“호세가 1루에 나가면, 나 또한 흥분이 된다. 그가 어떤 사고를 칠지에 대한 흥분보다는, 그의 열정이 내 몸에 녹아드는 흥분일 것이다. 야구를 하면서, 항상 구단 내 젊은 선수들에게 귀감이 되던 선수가 바로 호세였다. 호세는 정말 자이언트가 아닌 자이언츠였다.”-그의 동료인 롯데의 에이스 손민한(32)-

2007년 전지훈련 도중 아킬레스건 부상으로 4월 13일에야 겨우 1군에 올라왔고 홈런 1개와 타율 2할5푼6리, 타점 12개가 마지막으로 그가 우리에게 보여준 성적표이다. 다른 선수라면, 잘했다는 칭찬을 받을 수도 있는 성적이지만, 호세에게는 ‘그것에 그쳤다’라는 표현이 붙는 것도 팬들은 아쉽다. 한국 프로야구 최초의 타격 5관왕을 노리기도 했었던 롯데 ‘용병 영웅’ 펠릭스 호세를 두고 팬들은 말한다. 호세가 떠남은 선수로서의 은퇴이자 잠시 동안의 이별이라고.

당신을 사랑했던 이 들에게 이 하얀 여백에 내 글이 부족함을 미안하게 생각한다. 야구를 본 시간은 짧지만, 정말 그를 야구인이 아닌, 형님, 영웅으로써 모두가 사랑했고, 사랑 받기에 충분했다. 당신이 ‘검은 갈매기’로 한때 불렸던 것은 특이해서가 아니라, 특별했음을 이제야 팬들은 말한다. 그리고 나 또한 호세 당신이 떠났을 때 누구보다 많이 눈물을 머금던 당신의 열렬한 팬이었음을 이제야 고백한다.

박정태가 부상으로 신음하다 돌아온 공백만큼 당신이 없던 2001년부터 2005년까지는 롯데에게는 얼마나 힘든 시절이었는지. 당신은 모르겠지만 5월 11일 당신을 보기 위해서 잠실 구장 앞을 서성이면서 눈물을 보이던 이들이 많았다는 것을 당신이 아려나...아마, 지금 당신이 여기에 있다면 지금쯤 쉼터에서 울고 있는 롯데 팬들에게 예전처럼 말하지 않을까라고 팬들은 생각에 잠길 것이다. 언제나 그랬듯이 롯데 팬들을 오른 손으로 감싸안고 뒤로 숨기며, “내가 당신들 가슴에 영원히 있으니 괜찮다.”라고...

나 또한 지금 그를 만나면, 호세 당신을 좋아하는 열성팬 처럼 이성적인 대화가 아닌, 영어도 아닌, 그가 종종 사용하는 스페인어도 아닌 한국말로, “어디 아픈데 없느냐.”라고 물을 것이다. 당신이 어렸을 적 나를 감싸주며, 뒤로 숨겨주었듯이, 이제는 우리가 그럴 수 있다는 것에 나는 조금은 행복하다.

"내가 게으르지 않을 수 있었던 것, 그리고 끊임없이 반성할 수 있었던 것은 호세가 존재하기 때문이었다."2001년 박정태(38, 롯데 자이언츠 코치) 시즌을 마치고-

경이적인 0.503이라는 출루율. 많은 타자들이 루상에 나가는 것보다 돌아오는 것이 많았을 때, 호세는 다른 이보다 루상에서 조금 더 시간을 보냈다. 2001년 6월 17일부터 9월 18일까지 끝나지 않을 것 같은 62경기 연속 출루. 최고 연장자로서의 각종 무수한 기록들. 현재는 모두 호세의 이름으로 새겨져 있다. 당신은 우리를 항상 웃게만 해주었다. 그리고 단 한번 울게 해주었다. 그 날이 바로 당신이 떠나던 날이었다.

2007년 5월 12일

LA로 출발하는 비행기를 기다리는 출국장의 인파속에 한명의 건장한 남자가 있었다. 도밍고 펠릭스 호세였다. 지금쯤이면 운동장에 도착해서 경기를 준비하고 있었어야 할 시간이었다.

그러나 그는 야구장 대신 공항에, 유니폼 대신 사복을 입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손에는 배트가 아닌 도미니카 행 비행기 표가 쥐어져 있었다. 호세는 창가에 서서 비가 오는 풍경을 말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뉴스를 통해 호세의 퇴출 소식을 전해들은 롯데 자이언츠 팬들 몇명이 헐레벌떡 공항으로 뛰어들어왔다.

팬들은 고향 도미니카로 가는 비행기표를 손에 쥐고 있는 호세의 모습을 보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어쩌면 이날 내리는 비는 롯데 팬들의 눈물이었는지 모른다. "아직 (나의) 팬서비스는 끝나지 않았다. 모두 건강하시기를." 공항 직원에게 2007년 한국에서의 마지막 인사와 함께 그는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을 뒤로 한채 출국장 안으로 무거운 발걸음을 떼고 있었다.

당신을 진심으로 사랑했다. 그리고 팬들이 당신에게 마지막으로 받은 선물을 잊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나 또한 잊지 않을 것이다. 당신이 한국을 떠나기 전, 내게 전해준 마지막 싸인볼, 당신은 손으로 건냈지만, 나는 가슴으로 받은 그 싸인볼을... Hatsa la vista Felix Jose...

<사진-장원석>


▶ 관련기사 ◀
☞[명예기자석] Jose, 그가 내게 건네 준 마지막 싸인볼(中)
☞[명예기자석] Jose, 그가 내게 건네 준 마지막 싸인볼(上)

이데일리
추천 뉴스by Taboola

당신을 위한
맞춤 뉴스by Dable

소셜 댓글

많이 본 뉴스

바이오 투자 길라잡이 팜이데일리

왼쪽 오른쪽

스무살의 설레임 스냅타임

왼쪽 오른쪽

재미에 지식을 더하다 영상+

왼쪽 오른쪽

두근두근 핫포토

  • 태연, '깜찍' 좀비
  • ‘아파트’ 로제 귀국
  • "여자가 만만해?" 무슨 일
  • 여신의 등장
왼쪽 오른쪽

04517 서울시 중구 통일로 92 케이지타워 18F, 19F 이데일리

대표전화 02-3772-0114 I 이메일 webmaster@edaily.co.krI 사업자번호 107-81-75795

등록번호 서울 아 00090 I 등록일자 2005.10.25 I 회장 곽재선 I 발행·편집인 이익원 I 청소년보호책임자 고규대

ⓒ 이데일리.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