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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성 보컬 트리오 장덕철은 2018년 초 음원 차트에서 가장 주목받는 가수 중 한 팀이다. 지난해 11월 발매한 ‘그날처럼’으로 12월 말부터 차트 상위권에 이름을 올리더니 2개월 가까이 차트 최정상권에서 자리를 유지하고 있다. 장덕철은 무명에 가까웠다는 점에서 연초 차트에서는 이변의 주인공으로 꼽히고 있다. 하지만 이 자리에 서기까지 장덕철은 고생이 적지 않았다.
“작년에 차를 사기 전까지는 매니저가 없어서 스피커 같은 장비들을 직접 들고 버스와 지하철을 이용해 이동을 했어요. 하루에 10만원을 준다고 해도 가서 공연을 했죠. 많게는 하루에 4번까지 공연을 했어요. 대학로에서 삼성동으로 갔다가 여의도를 거쳐서 신촌에서 마지막 일정을 소화한 적도 있어요.”
‘빡세게 고생했다’는 점에서는 어디에서도 자부할 수 있다고 했다. 모든 게 불확실한 시기였다. 그 상황에서도 음악을 포기하는 건 최후의 순서로 미뤄두자고 했다. 꾸준히 음반을 내고 버스킹을 했다. 2015년 초에는 한파로 인해 거리에 사람들이 한명도 없을 때 자신들끼리 노래를 불러 사람들을 모은 적도 있다. 장덕철은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니까 보는 사람이 없어도 우리끼리 신이 났다. 그래도 공연을 마칠 때 쯤 되니까 몇명은 서서 보고 있었다”며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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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덕철을 인터뷰하기에 앞서 궁금했던 게 세가지가 있다. 하나는 팀명을 어떻게 지었느냐다. 한 사람의 이름처럼 느껴진다. 영문으로 그룹명을 짓지도 않았고 의미도 모르겠다. 실제로는 멤버 장중혁과 (강)덕인, 임철의 이름에서 한글자씩 따붙였다. 멤버들은 “그룹 이름을 뭐로 지을지 고민했는데 상투적인 이름만 나왔다. 어느 순간 이름 한글자씩 해서 장덕철이라고 하면 어떻겠느냐는 아이디어가 나왔는데 어감도 괜찮고 부르기 편해서 해보자고 했다”고 설명했다.
마지막은 자신들이 생각하는 1위 및 롱런 비결이었다. 몇몇 평론가들에게 같은 질문을 했을 때 돌아온 대답은 “편안한 느낌 외에는 모르겠다. 유명한 가수들에게도 그런 노래는 꽤 있다”였다. 장덕철도 “우리 같은 느낌의 발라드는 흔하다”고 했다. 대중에게 익숙하지 않은 가수라는 점이 궁금증을 자극했고 차트 순위로 이어진 것 아니겠느냐는 게 장덕철의 분석이었다. 장덕철은 “차트 1위에 오르고 롱런할 수 있는 노래의 공식을 파악했다면 그걸 알려드리지 않을 거다. 우리만 간직하고 계속 누러야 할 것”이라며 “솔직히 운이 좋았다”고 털어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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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교 동창인 장중혁과 덕인은 성인이 돼 만나 팀을 꾸려보자고 했다. 고음과 중음의 음역대를 지니다 보니 저음을 잘 하는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덕인인 소개로 만나 친해졌던 세살 위 형인 임철에게 제안을 했다. 음악에 대한 꿈을 접고 쇼핑몰 사업을 하고 있던 임철이 다시 가수를 꿈꾸기 시작하면서 장덕철이 완성됐다. 2015년 1월 ‘그때, 우리로’를 발매하며 세상에 장덕철의 존재를 알렸다. 3년여의 고생 끝에 마침내 커다란 결실을 얻었다.
그렇다고 서두를 마음은 없다고 했다. 더 준비를 잘 해서 신곡을 내보여야 하기 때문에 붕 뜬 마음을 다잡고 있는 중이라고 했다. 대중의 기호에 맞춘다기보다 자신들이 하고 싶은 음악, 대중에게 들려주고 싶은 음악을 하는 데 집중할 계획이다.
“이번에 1등을 했으니까 다음에도 1등을 해야겠다는 욕심은 내지 않으려고요. 우리 음악을 좋아하는 분들이 늘었다는 것에 만족을 합니다. 순위에 연연하면 우리가 하고 싶은 음악을 못할 거 같거든요. 음악을 하는 게 우리 목표입니다.”
올해는 4000석 규모의 공연장을 매진시키는 공연을 해보고 싶다고 했다. 지금까지 단독 공연은 500석 규모, 페스티벌에서는 2000명 앞에서 노래를 해본 적이 있다. 물론 행사 섭외 스케줄이 늘어나 실질적으로 수입에 도움이 됐으면 하는 바람도 숨기지 않았다.
가수로서 향후 목표도 장덕철이었다. 함께 팀으로서 목표를 정한 적은 없다고 했지만 각자의 목표를 엮으면 하나가 됐다. 꾸준히 음악을 하면서(장중혁) 음유시인이라 불리는 선배들처럼 연습실에서 살면서 공연활동을 하고(덕인) 결국에는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가수(임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