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데일리 SPN 김삼우기자] 고종수는 최근 스포츠 전문 주간지 <스포츠 2.0>
▲오로지 내 잘못이다
“트레이드 소식을 들었을 때 너무 충격적이었다. 나에게 아무 말도 없이 이뤄져 더 그랬다. 그때 축구를 그만뒀어야 하지 않았나 생각하기도 한다. 하지만 내 자신을 버리지 못해 더 힘들었던 것 같다. 두려움이 너무 많았다. ‘내가 그래도 고종수인데’라는 자만심도 있었다. 언론에서 내 문제를 다룰 때도 공격적이었던 것 같다. 그래서 그라운드에서 빨리 보여주고 싶었다. 몸이 되지 않으면 2군에서 뛰는 게 당연했다. 차범근 감독님은 준비를 제대로 하지 않는 내가 서운했을 테고, 나는 나대로 서운했던 모양이다.
그때 지금 마음의 50%만 가지고 있었어도 이렇게까지 되지 않았을 것이다. 오롯이 내 잘못이다. 예전 생각만하고 현실에 충실치 않았다.
당시 우울증이 왔다. 모든 게 부정적으로 보였다. 차가 매연을 뿜고 지나가도 화가 났고 누가 정신 차리라고 해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보기에 안타까워서 해주는 말임에도 불구하고 ‘불난 집에 부채질하나’하는 식으로 받아들여지더라. 우울증 때문에 판단 능력이 많이 떨어졌다. 처음 프로에 왔을 때는 모든 게 긍정적이었다. 누가 욕을 해도 대수롭지 않게 받아 넘길 정도였다.“
▲처음 프로에 왔을 때로 돌아가고 싶다
하지만 고종수는 게으르고, 훈련에 성실치 못하다는 지적을 받아 왔다. 그의 거침없는 언변 탓에 오해도 많이 받았고 음주 등 갖가지 설에 시달리기도 했다. 그러나 설들은 상당 부분 잘못 알려진 게 많다고 억울해 했다. 단지 이상할 정도로 훈련에 집중하기 힘든 상황들이 이어졌다고 기억했다.
“고등학교 때는 너무 힘들어서 싫고 프로에 처음 왔을 때로 돌아가고 싶을 때가 있다. 돌아간다면 자제하면서 살 것 같다. 내 축구인생에선 ‘자유로움 속의 절제’ 그런 게 필요했었다
.
바깥에는 내가 술을 많이 먹으며 다닌 것으로 알려졌는데 그렇지 만은 않았다. 다만 어렸을 때부터 의리를 중요시했다. 누가 힘들다고, 어렵다고 찾아오면 마다하기 쉽지 않았다.
아는 형이 여자 친구와 헤어졌다고 울먹이면서 전화하면 들어줘야 한다고 나가고, 또 어떤 형님은 이혼 도장을 찍고 왔네 하고 펑펑 울고 그러면 또 나가서 소주 한잔하고 하는 식었다. 이렇게 나가 밤 늦게까지 있다보면 잠도 제대로 못자고 피곤한 상태에서 운동을 하게 된다. 집중이 될 리 없었다.
또 고등학교 친구가 교통사고로 죽었다고 하는데 안 가 볼 수 있나. 운동을 마치고 차를 몰고 상가에서 밤을 새고 운동한 적도 있다. 감독님은 그래도 프로라면 자제해야 한다고 하지만 쉽지 않잖은가. 좋게 말하면 의리가 있다고 할 수 있지만 나쁘게 말하면 팔불출이었다.“
▲다시 새벽에 뛰게 한 건 이름도 모르는 팬들
방황이 길었다. 다시 일어서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고종수를 새벽 러닝으로 이끈 힘은 이름도 모르는 팬들의 성원이었다.
“운동을 다시 하려 했을 때 미니 홈피에 팬들에게 쪽지가 많이 왔다. 이런 내용이 있었다.‘예전의 고종수를 바라지 않습니다. 운동장에서 묵묵히 열심히 하는 고종수를 보고 싶습니다’ 읽으면서 눈물을 뚝뚝 흘렸다. 꼭 해내야겠다고 생각했다. 지난 번 골을 넣었을 때 그들도 눈물을 흘렸다고 하더라.
고등학생이 홈피에 오기도 한다. 공부를 그만두고 싶을 때가 있는데 힘을 얻었다고 하면 스스로 또 힘이 난다. ‘역시 축구 선수는 그라운드에 있어야 하는구나’하고 절감한다. 이런 메시지를 보내는 이름 모르는 팬들이 나를 새벽에 뛰게 한다. 이런 분들을 생각해서라도 열심히 하고 그라운드에서 좋은 모습을 보이면 아름답지 않겠나.
한창 방황할 때 산에 자주 갔다. 혼자 갈 때도 있고 친구들과 갈 때도 있었다. 한번은 친구 한 명이 중간에서 힘들다고 포기하고 싶다고 하더라. 그래서 나는 운동할 때 네가 하던 생각 수 십번도 더했다고 하니까 아무 말도 않고 정상까지 올라가더라. 그런 모습들을 보면서 정말 어려운 상황에서 포기하지 않고 열심히 최선을 다하면 죽으라는 법은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종수, 안정환(수원 삼성), 이동국(미들즈브러)은 1998년 K리그 르네상스를 주도했던 트로이카다. 이후 서로 다른 길을 걸으며 각자의 우여곡절이 있었다. 공교롭게 안정환과 이동국은 요즘 사정이 좋지 않다. 트로이카 이야기를 꺼냈다.
“트로이카면 뭐하나. 셋 다 헤매고 있는데. 정환이형은 이해할만 하다. 수원은 우승을 해야 하는 팀이다. 나도 수원에 있었으면 게임에 제대로 나가지도 못했을 것이다. 정환이 형 이야기를 들어보면 몸은 괜찮다고 하는데 자신감이 떨어진 것 같다. K리그에 돌아와 한골도 못 넣었다는 심리적인 압박감도 있는 것 같더라.(안정환은 컵 대회에선 5골을 넣었지만 정규리그에서 무득점에 그치고 있다) 천하의 안정환이. 그런 상황이면 소극적으로 된다.
수원은 최고의 선수들이 모인 팀이다. 선수층도 두텁다. 혼자 해결하기도 그렇고 주위 사람들의 많은 도움이 필요하다. 혼자 끙끙 앓지 않을까 생각된다. 어디든 마음 편하게 뛸 수 있는 곳으로 가서 하는 게 좋지 않을까 생각하기도 한다. 빨리 살아나 운동장에서 멋진 모습을 보여주기를 바란다.
동국이와는 가끔씩 통화한다. 현지 언론은 골만 이야기하고 팀에서는 다른 스트라이커를 찾는다는 이야기도 나오고, 부담이 클 것 같다. 또 쌍둥이 아빤데, 마음고생이 심할 것 같다. 동국이도 빨리 자신감을 찾았으면 좋겠다.“
▲박주영은 빨리 결혼해서 유럽에 가는 게 좋다
고종수 이후 ‘축구천재’로 각광을 받은 이가 박주영(FC 서울)이다. 그도 불과 얼마 전까지 부상에 시달리며 명성에 걸맞지 않은 부진에 빠져 있었다. 하지만 고종수는 박주영을 높이 평가하면서 '빨리 유럽으로 가라'고 했다. 자신은 천재가 아니고, 박주영 같은 선수가 천재니까 잘 키워야 하지 않느냐고도 했다.
“잘하는 후배다. 내가 주영이라면 빨리 결혼해서 유럽 무대에 도전하겠다.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등 빅 스리(3) 리그는 아니더라도 어디든 빨리 나가는 게 좋다. 혼자 가면 외롭고 향수병도 걸릴 수 있으니까 부모님이나 결혼해서 아내랑 같이 가는 게 좋을 것이다.
K리그 발전도 중요하지만 주영이 같은 선수는 유럽에 나가 되든 안되든 부딪혀 보는 게 좋다. 처음부터 빅스리 리그는 무리라 하더라도 네덜란드, 프랑스 리그도 괜찮다. 박지성 이영표도 그런 과정을 거치지 않았나. 이천수도 처음에 스페인 리그에 가기보다 네덜란드에 갔었으면 더 낫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고종수는 박주영을 이야기하면서 특히 언론에 하고 싶은 말이 많았다.
“주영이는 같이 겪어보지는 않았어도 말수가 적고 순한 성격 같다. 그런 사람들이 마음도 여리다. 이런 선수들은 언론에서 도와줬으면 좋겠다. 야단칠 때 야단치더라도. ‘박주영 올 시즌 이대로 끝?’이라는 제목을 단 기사가 기억난다. 한창 재활하고 있는 중이었는데. 이런 기사를 보면 선수가 얼마나 상처를 받겠는가. 그런데 복귀해서 올림픽 대표팀에 가지 않았나. 몸도 아프고 마음도 아픈 상황에선 운동장에 빨리 설수 있도록 도와줘야 한다. 주영이 같은 천재는 정말 동생같이 챙겨주고 잘 키우면 우리 나라 축구 발전에도 큰 도움이 된다.
동국이도 여리고 기사에 민감하다. 나는 성격이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지만 이런 선수들은 기사에 상처를 많이 받는다.
심지어 나도 많이 느꼈다. 처음에 인터뷰할 때 솔직한 모습을 보여주겠다는 생각에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이야기 했다. 그러다 보니 어느 순간 머리 염색을 하면 '싸가지가 없다’는 식의 이야기가 나오더라. 한번 인상이 그렇게 심어지니까 대책이 없었다. 잘 할때는 솔직담백, 신선 등등으로 이야기되다가 페이스가 떨어지니까 그대로 마이너스가 되더라.
대전에 처음 왔을 때도 최윤겸 감독님께 경기에 나갈 때까지는 인터뷰를 안하겠다고 했다. 내 이름이 언론에 거론되는 것도 싫었다“
▲결혼? 지금이라도 하고 싶다. 하지만
‘무서운 아이(앙팡 테리블)’ 고종수도 벌써 내년이면 나이 서른이다. 결혼을 생각할 때다.
“지금도 하고 싶다. 하지만 뭘 좀 해 놓고 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라운드에서 멋진 모습을 보이는 게 우선이다. 또 결혼은 신중하게 생각해야 할 문제다. 다만 어른을 공경하는 사람들을 보면 악한 사람은 없는 것 같다. 서로를 이해해 줄 수 있으면 좋겠다. 축구 선수는 특수직이다. 합숙도 해야 하고, 훈련도 많이 하고, 이해를 많이 해줘야 한다. 서정원 선배 형수님이 멋있다. 너무 선하시고, 오로지 남편과 아이들 생각만 하신다.”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정말 많이 달라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게으르고 불성실한 천재’로 불리던 그가 바른 소리만 하는 사람으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너무 얌전해지고 겸손해 진 것 아니냐고 했더니 고개만 흔들었다. 그에게 악연이었다고 할 만한 몇몇 지도자 이름을 거론해도 “그라운드에서 만나도 안 좋은 감정은 없다. 어렸을 때, 철 없었을 때 이야기들이다. 그분들의 축구 철학을 못 따라 간 것일 뿐이다”고 했다.
고종수의 부활은 아직 진행형이다. 하지만 그가 이야기했듯 생각이 바뀐 게 달라진 점이라면 그의 재기 드라마가 해피엔딩으로 끝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할만 했다. 그러면 그가 “내 축구인생을 한번 영화로 만들어 보면 어떨까”라고 바랐던 것처럼 그의 이야기를 영화로 풀어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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