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신성일은 60년 가까이 500편 이상의 작품에 출연하며 한국영화사에 한 획을 그은 대배우였고 한국의 그레고리 펙, 알랭 드롱으로 불리며 최고의 인기를 누린 대스타였다. 황혼의 나이에 병마와 싸우면서도 마지막 순간까지 영화혼을 불태운 천생 배우였다.
1937년 경북 대구 출생인 고인은 청계천에서 호떡을 팔다가 한국배우전문학원에 들어가면서 인생이 바뀌었다. 1957년 신상옥 감독이 운영했던 신필름 배우 모집에 발탁돼 신상옥 감독에게서 ‘뉴스타 넘버원’이란 뜻을 지닌 신성일이란 예명을 받았다. 1960년 신상옥 감독의 ‘로맨스 빠빠’로 영화계에 데뷔했다. 젊은 시절 조각 같이 잘생긴 외모와 반항적인 이미지로 1960년대를 대표하는 청춘스타가 됐다. 이 시기에 출연한 영화들이 ‘맨발의 청춘’(1964) ‘떠날 때는 말 없이’(1964) ‘위험한 청춘’(1966) ‘불타는 청춘’(1966) 등이다. 그 중에서도 가난한 청년과 부잣집 딸의 사랑을 그린 ‘맨발의 청춘’은 고인의 출세작으로 당시 청춘 멜로드라마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고인의 활동은 1970년대에도 왕성하게 이어졌다. ‘별들의 고향’(1974) ‘겨울여자’(1977) ‘길소뜸’(1985) 등을 통해 더 이상 불안한 청춘이 아닌 기성세대를 대변하며 국민배우로 영향력을 키워갔다. 2000년에 들어서도 ‘태풍’(2005) ‘야관문:욕망의 꽃’(2013) 등에 출연하며 노익장의 건재함을 과시했다.
박찬욱 감독은 “이토록 한 사람에게 영화산업과 예술이 전적으로 의존했던 나라는 동서고금을 통틀어 없었다”며 “신성일을 이해하지 않고는 한국 영화사는 물론 한국 현대 문화사 자체를 파악할 수 없다”고 말하기도 했다.
고인은 1964년 톱스타 엄앵란과 결혼으로도 화제를 모았다. 두 사람은 ‘맨발의 청춘’ ‘동백아가씨’ 등 그 해에만 20여편의 작품에서 호흡을 맞췄고 부부의 연을 맺었다. 예식 당일 세기의 커플을 보기 위해 구름 인파가 몰렸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둘 사이에 1남2녀를 뒀다.
고인은 영화계로 복귀한 뒤 틈틈이 작품 활동을 하며 한국영화 발전을 위해 애써왔다. 그러다가 지난해 6월 폐암 진단을 받으면서 투병 생활을 해왔다. 아픈 와중에도 “나는 병에 질 정도로 나약하지 않다”며 “폐암에 지지 않겠다”며 삶에 대한 의지를 보였다. 영화에 대한 애정은 삶에 대한 의지 이상이었다.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 회고전의 주인공으로 부산을 방문해 “나는 ‘딴따라’라는 말을 싫어한다”며 “나는 종합예술의 한 가운데 있는 영화인이라는데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고 위풍당당한 모습을 보였다.
고인은 최근까지 작품 활동에 매진하며 영화에 대한 관심을 놓지 않았다. 지난해 이어 올해도 부산국제영화제에 참석해 밝은 모습으로 관객과 대중을 만났다. 이장호 감독과 새 작품도 계획하고 있었고, 오는 9일 신영균예술문화재단에서 주최하는 ‘제8회 아름다운예술인상’ 공로예술인상 부문 수상자로 선정됐으나 참석하지 못하게 됐다. 영원한 스타, 배우였던 신성일은 숨이 멎는 순간까지 영화를 사랑한 영화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