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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제공] 전신거울로 추레한 나신(裸身)을 처음 제대로 쳐다보았을 때의 느낌이 이럴까. 다큐멘터리 두 편을 보고 나서 종(種)으로서의 인간이 부끄러웠다. 지난 주말(3월 27일) 대학로의 작은 극장 하이퍼텍 나다에서 개봉한 생태 다큐멘터리 '작별'과 '어느 날 그 길에서'. 10년 가까운 시간 동안 차가운 아스팔트와 동물원을 쫓아다니며 영화를 완성한 황윤(36) 감독을 1일 만났다. '생태학적 감수성'이란 표현이 어떤 의미인지를 느끼게 해준 이 여성 감독은 "지구라는 별에서 인간만 사는 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으면 좋겠다"고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느 날 그 길에서'는 로드 킬(Road Kill·도로에서 죽음)을 당하는 야생 동물들의 이야기. '작별'은 아이들에게는 꿈과 낭만의 동산인 동물원이 갇힌 동물들 입장에서는 감옥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서 비롯됐다.
소재 자체도 한국에서는 유례를 찾기 힘들지만, 이 다큐멘터리의 힘은 그의 겸손한 시선에서 출발한다. '볼링 포 콜럼바인' '화씨 9/11'의 마이클 무어(Moore)였다면 자동차에 치여 죽은 삵의 시신을 상자에 담아 도로공사 사장이나 국토해양부 장관을 집요하게 쫓아다녔을 것이다. 하지만 황 감독은 '선동'하거나 '주장'하지 않는다. 대신 고속도로 위의 비명횡사와 동물원에서 서서히 미쳐가는 풍경을 야생동물들의 입장에서 담담하게 보여줄 뿐이다.
황 감독은 "선동은 순간적이지만, 성찰은 길다"면서 "욕하고 공격하기보다, 어떻게 하면 이 '인간의 동반자'들과 조화롭게 살 수 있을지를 한 번쯤 돌아보게 하고 싶었다"고 했다.
그가 꿈꾸는 '조화로운 삶'은 그리 멀리 있거나 실천하기 어려운 일이 아니다. 신문사 인터뷰실에서 그녀가 창 밖을 가리켰다. 하얀 목련이 막 피어나려고 안간힘이다. 그는 자신의 아파트 화단 이야기도 꺼냈다. 매화와 봄의 새순을 찾아온 주먹만한 작은 새들을 목격했을 때의 기쁨. 그 풍경의 '발견'과 그 새의 이름이 '오목눈이'라는 것을 알아내는 과정이 '조화로운 삶'의 시작이라고 했다. "자연과 함께 산다는 건 그리 거창한 게 아니에요."
고속도로 건설의 주체인 도로공사가 개봉 하루 뒤인 28일 황 감독을 초청해 자체 상영회를 열었고, 황 감독 영화 최대의 기여자인 야소모(야생동물소모임)와 이 영화를 응원하는 모임인 '팔팔이의 친구들'에도 격려의 글이 쇄도하고 있다. 그는 "억울한 일이 있어도 표현조차 하지 못하는 이들의 통역자이자 영매(靈媒)가 되고 싶다"고 했다. 희디흰 목련이 막 터지려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