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FL 수퍼 보울, 뉴잉글랜드의 패배와 말년 병장

  • 등록 2008-02-05 오전 9:35:54

    수정 2008-02-05 오전 9:35:54

[로스앤젤레스=이데일리 SPN 한들 통신원] 우리 조상들은 슬기로웠습니다. 큰일을 앞두고는 몸가짐을 바르게 하는데 온갖 주의와 정성을 다 기울였습니다. 목욕재계(沐浴齋戒)가 바로 그것이죠. 현대에 와서 그것은 어떻게 치환됐나요. 제대를 앞둔 군인들이 흔히 말하는 ‘떨어지는 낙엽도 조심하라’는 버전이 되었습니다.

듣는 이에 따라선 말년 병장들의 우스개 소리로 들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거기에 삶을 대하는 겸손이 담겨 있습니다. 그것은 한 치 앞도 못 내다보는 미래에 대한 스스로의 경계임과 동시에 현재의 삶에 대한 반성이기도 한 때문입니다.

제42회 수퍼보울이 막을 내렸습니다. 전문가들과 도박사들의 예상을 뒤엎고 NFC 와일드카드 턱걸이로 올라온 뉴욕 자이언츠가 18전전승의 무적함대 뉴잉글랜드 패이트리어츠를 꺾고 파란의 정상에 올랐습니다.

그런데 수퍼보울이 열리기 전까지 뉴잉글랜드한테 어떤 일이 벌어졌나요? 1972년 마이애미 돌핀스의 17전 전승 우승보다 더 완벽한 19전 전승 우승을 눈앞에 둔 뉴잉글랜드에 대한 질시와 저주의 ‘흔들기’, 그것이었습니다.

시즌 개막전서 명장 빌 벨리칙 감독의 치부를 한꺼번에 까 발긴, 상대 수비 작전을 훔쳐 본 ‘스파이 게이트’가 뜬금없이(?) 수면위로 떠올랐습니다. 급기야 수퍼보울 전날엔 2002년 세인트루이스 램스와의 수퍼보울을 하루 앞두고서도 램스의 마지막 리허설을 비디오로 녹화했다는 ‘뉴’ 스파이 게이트가 언론을 도배했습니다.

스파이 게이트는 한 정치인이 “왜 당시 입수한 비디오 테이프들을 파기시켰느냐”며 NFL에 생떼를 쓰면서 제기됐습니다. 공교롭게도 그 정치인은 뉴잉글랜드의 또 다른 라이벌이기도 한 필라델피아 이글스의 골수팬입니다.

그리고 나선 리허설을 찍는 뉴잉글랜드의 정체불명 카메라맨에게 램스 선수들이 손을 흔들어 주기까지 하는 장면이 담긴, 기억도 가물가물한 6년 전의 뉴 스파이 게이트가 마지막 휴식을 취하고 있던 뉴잉글랜드 선수들의 호텔방 TV 화면을 가득 채웠습니다.

일부 풋볼 칼럼니스트들이 ‘그렇다고 뉴잉글랜드의 업적이 훼손되지도 않고 지지도 않을 것’이라며 옹호하고, ‘약물 문제와 게임맨십을 구분도 할줄 모르는 공화당 상원의원 알렌 스펙터는 본업인 정치에나 신경 쓰라’고 일침을 놓았지만 그 파장은 일파만파로 번졌습니다. 그리고 결과는 마지막 4쿼터 2분39초를 못 버틴 뉴잉글랜드의 14-17 역전패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절대 최강이라던 뉴잉글랜드가 그렇게 ‘저주의 굿판’에 이리 뒤집히고 저리 뒤집히기를 당하는 동안 자이언츠는 어떠했나요?

명 쿼터백 아버지와 3형제가 모두 풋볼 선수인 ‘풋볼 명가’의 막둥이 쿼터백 일라이 매닝은 시즌 막판부터 마치 ‘개안’이라도 한 양 눈부신 플레이를 펼치며 마침내 아버지와 네 살 터울의 둘째 형 페이튼의 그늘에서 벗어날 기회를 잡았다는 찬사를 받았습니다(34세 맏형 쿠퍼는 목 부상으로 선수 생활을 접었습니다).

페이튼과 항상 비교되는 것에 대해 “그만한 찬사가 어디 있는가. 오히려 난 그때문에 늘 형처럼 되려고 노력했다”면서 대견하게 말한 27세의 이 청년은 지난 4년간의 이미지를 한꺼번에 씻어내고 미증유의 ‘2년 연속 형제 수퍼보울 MVP’라는 쾌거를 이뤄냈습니다.

다른 자이언츠 선수들은 또 어땠나요. 시즌 내내 부상을 달고 다녔던 리시버들은 뉴잉글랜드와의 시즌 최종전을 앞두고 일제히 완쾌해 처음으로 일라이와 함께 손발을 맞추더니 결국 수퍼보울 절체절명의 순간에서 일을 냈습니다.

데이빗 타이리는 매닝의 32야드 패스를 뒤로 넘어지면서도 끝까지 볼을 움켜쥐고 놓치지 않아 대역전의 불씨를 살려냈고, 곧이어 시즌 내내 발목 부상으로 고생했던 리딩 리시버 플랙시코 버레스는 종료 39초 전 일라이의 첫 번째 전광석화 13야드 패스를 받아 마침내 승리를 확정짓는 역전 터치다운을 찍어냈습니다.

저는 이번 뉴잉글랜드의 패배에서 다시 한번 스포츠에서만 존재하는 ‘주술(呪術)’의 전율을 느꼈습니다. 저주의 굿판이었습니다. 그것은 인력으로 어찌할 수 없는 일이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뉴잉글랜드는 떨어지는 낙엽도 조심하는 말년 병장들처럼 스스로 삼가고, 또 삼가며 반성하고 겸손해야 하지 않았었나 하는 만시지탄이 듭니다.

무릇 저주란 그 누구보다도 자신에게서 비롯된다는 것이 다반사인 게 우리네 인생 아니던가요?

이데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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