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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일리 SPN 정철우기자] ‘7’은 우리에게 희망을 주는 숫자다. 왠지 좋은 일이 생길 것만 같은 설레임을 품고 있다. 바꿔말하면 ‘7’에 대한 사람들의 기대는 인간이 자신의 미약함을 인정하는데서 출발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김성근 감독은 한국시리즈 우승으로 자신의 인생 마지막 퍼즐을 채워낸 뒤 축하인사를 건네는 사람들에게 늘 같은 말을 했다. “다 덕분입니다. 고맙습니다.”
실제로 큰 도움이 됐던 사람들은 물론 그다지 인연이 없었거나 자신에게 해가 됐던 사람들에게도 웃으며 ‘덕분’이라고 말했다. 자신의 힘만으로 여기까지 올 수 없었다는 솔직한 마음에서 나온 말이다.
한국시리즈가 끝난 뒤 시리즈를 위해 김 감독을 만나 삶에 대한 이야기를 청했을 때 그는 잠시 눈을 감고 생각에 잠기더니 이렇게 말했다. “돌이켜보면 말야.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난 덕을 본 것 같아. 사람들 때문에 힘든 적도 많았지만 내가 정말 어려울 땐 희한하게 내게 도움을 주는 사람들이 나타났어. 그런 힘들이 없었다면 지금의 나도 없었지 않나 싶어.”
김 감독에겐 왠지 ‘독립군’의 분위기가 풍긴다. 어려움을 스스로 뚫고 모든 것을 이뤄냈을 것만 같은 느낌을 준다. 그러나 그는 무겁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홀로 잘나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했다. 젊은 시절 호기롭게 친 사고를 무마시켜 준 형사나 모르고 있던 자신의 병을 찾아 치료해 준 의사 이야기 등등 고마운 사람들의 고마웠던 일들 하나 하나에 감사의 뜻을 전했다. 그 중 가장 극적이고 흥미로웠던 이야기 두가지를 정리해봤다.
가쓰라고교 3학년 무렵. 김 감독의 가족은 일본을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목적지는 한국이 아닌 북한이었다. 당시 재일교포들에게 한참 붐을 이뤘던 북송선, 만경봉호를 타기로 했던 것이다.
북한은 재일교포들에게 만민이 평등하며 모두가 ‘이팝(쌀밥)에 고깃국’을 먹을 수 있을만큼 부유한 나라가 됐다고 선전했다. 찢어지게 가난했던 이들에게 이보다 더 귀가 솔깃한 소식도 없었다.
김 감독 가족은 북한으로 가기 위한 모든 서류절차를 마쳤다. 이제 만경봉호만 타면 북한 주민으로 새 삶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 즈음 김 감독에게 뜻밖의 제의가 온다. 당시 재일동포 야구협회 이사였던 최태황씨가 학교로 찾아와 한국에서 열리는 봉황기 고교야구에 재일교포 선수단으로 참가하라는 권유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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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감독은 무엇인가에 이끌리 듯 그 제의에 응했고 생각지도 않던 한국 땅을 밟게 됐다. 그가 찾은 한국은 듣던 것과는 달랐다. 부유하진 않았지만 한번 해보자는 역동성이 느껴졌다. 따뜻한 환영까지 받고 돌아간 김 감독은 곧바로 가족들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듣던 것과는 다릅니다. 한국은 나름대로 발전하고 있습니다. 한국이 사람 살 곳이 아니라는 말은 거짓말이었어요.”
결국 김 감독의 설득으로 가족은 북한행을 포기하게 됐다. 만약 그때 최태황 이사가 찾아오지 않았다면 어떻게 됐을까. 북한은 그의 인생과도 같은 야구가 거의 흔적만 남아 있는 땅. 김 감독은 “글쎄 뭐가 됐을진 모르겠지만 그렇게 특출난 사람은 못됐을 것”이라며 웃어보였다.
지난 2004년 어느날. 김 감독은 지바 롯데 사노 코치로부터 전화 한통을 받는다. “우리 팀 다카이시씨가 한국에 가니 잘 부탁합니다.” 사노 코치는 김 감독이 OB 감독 시절 타격코치로 영입했던 인물. 김 감독은 정성껏 다카이시씨를 도왔고 둘은 금세 가까운 사이가 됐다.
얼마 뒤 김 감독은 다카이시씨에게 비슷한 부탁을 받는다. 다카이시가 부탁한 인물은 바비 밸런타인 지바 롯데 감독이었다. 나중에 알게 된 일이었지만 다카이시는 밸런타인 감독의 치프 통역으로 그가 일본에서 가장 믿고 있는 심복 중 심복이었다. 밸런타인 감독이 미국 출신임에도 일본 내 어떤 감독보다 폭 넓은 정보력을 보유하는데 핵심적 역할을 하는 인물이 바로 다카이시였다.
마침 그때는 한국의 추석 연휴와 맞물려 있었다. 첫날 어쩔 수 없이 호텔에서 식사를 하는 바람에 밸런타인 감독이 계산을 하게 됐고 김 감독은 미안한 마음에 다음날 저녁에 다시 만나 맛난 음식을 대접했다.
그리고 얼마 뒤 지바 롯데구단에서 김 감독에게 연락을 해왔다. 코치 영입제의 전화였다. 당시 구단 고위층에 의해 한차례 반려되기도 했지만 밸런타인 감독은 김 감독 영입을 관철시켰다. 그후 2년간 김 감독은 새로운 야구를 만나는 소중한 경험을 쌓게 된다.
*덧붙이기 :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했다. 김 감독이 행운이라고 말한 일들의 이면엔 김 감독이 보이지 않게 흘린 땀방울이 있었다.
가쓰라고교 시절, 김 감독은 근처 복싱도장에서 나머지 훈련을 했다. 돈을 낸 정식 수련생은 아니었지만 복싱도장의 잘 갖춰진 훈련 시설을 이용하고 싶어 일을 도와주며 짬짬이 훈련을 했다.
당시 도장을 운영하던 인물이 바로 최태황 이사의 사촌 동생이었다. 관장은 최 이사에게 “우리 도장에 한국계 야구 선수가 한명 오는데 정말 열심히 훈련한다”고 추천했고 그 덕에 재일교포 선수단에 합류할 수 있었던 것이다. 단순히 이름이 한국식이어서 눈길을 끌었다는 설도 있지만 그 정도로 운이 좋기엔 일본에 야구하는 고등학교가 너무 많다.
밸런타인 감독과 일화도 그렇다. 당시 김 감독은 밸런타인 감독에게 직언을 많이 했다. 밸런타인 감독이 코치들에 대한 불만을 털어놓았을 때는 “그건 틀린 말이다. 그런 건 감독이 안고 가야 한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밸런타인 감독은 김 감독과 헤어지며 “당신은 최고 입니다”라는 사인을 선물했다. 그 속엔 ‘나에게 직언을 해줄 수 있는 몇 안되는 사람’이란 뜻이 담겨져 있었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