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민상(52·사진) 수영 대표팀 감독은 '선수 박태환'을 올림픽 챔피언으로 만든 스승이자 은인이다. 정작 본인의 인생은 '잡초' 같았다. 오산중·고등학교에서 수영을 했을 뿐, 대표 선수같은 경력과는 거리가 멀었다. 가난 때문에 선수로서의 꿈은 싹을 틔워 보지도 못했다. 강원도에서 군 복무를 뒤 서울 강남의 한 초등학교에서 코치를 시작했다. 그때부터 공부를 시작했다. 서점에서 외국 전문서적을 한 권씩 사 모으고, 없는 책은 외국에 다녀오는 지인들에게 부탁해 구했다. 모르는 단어는 사전을 찾아가며 해석을 했다. 책장에 꽂히는 책이 늘어날수록 노하우가 쌓였다.
클럽 코치로 일하면서 지도자로 인정을 받아가기 시작하던 1992년, 큰 사고가 다시 한 번 그의 꿈을 꺾을 뻔했다. 운전을 하다 다른 차에 운전석 쪽을 들이받히는 사고를 당했다. 갈비뼈와 쇄골, 양쪽 발등 골절로 사지를 거의 움직이지 못한 채 병원신세를 져야 했다. 재활에만 몇 년이 걸렸다. 수영장 물 속에서 걷기 연습부터 다시 시작했다. 사고 후유증으로 노 감독은 지금까지 운전을 하지 않는다. 자동차를 좋아하는 박태환이 행여 운전하다 다칠까봐 노심초사하는 데는 이런 사연이 있다.
나이 마흔 즈음에 박태환을 만났다. 일곱 살 꼬마는 이미 기초를 배운 상태였다. "물에 들어가 보라고 했더니 수영을 곧잘 하더라고요. 가르치면 괜찮겠다 싶었죠." 제자의 가능성을 본 노 감독은 눈 앞의 성적에 연연하기보다는 유산소 운동을 꾸준히 시키며 지구력을 키우게 했다. 노 감독은 2004년 아테네 올림픽 때 유망주에 불과했던 박태환을 대표팀에 보내면서 자신의 꿈에 한 발 다가섰다. 하지만 박태환이 부정출발로 실격했다는 소식을 들은 날 밤, 박태환의 아버지와 밤늦게까지 소주잔을 기울여야 했다.
그런데 박태환이 작년 초 태릉선수촌을 떠나 후원사가 꾸린 전담팀으로 떠나면서 다시 한 번 좌절을 맛봤다. 우여곡절 끝에 2월에 박태환이 돌아온 뒤엔 서로 약속을 하나씩 했다. 박태환은 최대한 빨리 예전의 몸을 만들겠다고 다짐했고, 노 감독은 올림픽이 끝날 때까지 평소 즐기던 술을 끊겠다고 했다. 노 감독은 10일 박태환이 금메달을 따자 눈물을 흘렸다. 박태환의 훈련일지를 속에 넣어 뒀던 종이엔 '심장의 더운 피 식을 때까지'라는 글귀가 적혀 있다.
박태환의 뒤엔 한국체육과학 연구원의 송홍선 박사도 있다. 노 감독과 밤을 새워 가며 맞춤형 훈련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생리학에 바탕을 두고 주기적으로 훈련 전후의 젖산 측정을 해 성취도를 분석했고, 영법과 잠영 영상을 찍어 동작 분석을 하는 등 기술적인 부분에도 이바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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