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스앤젤레스=이데일리 SPN 한들 통신원] 8년 전 겨울이었습니다. 겨울 오후의 을씨년스러운 햇빛이 걸어오는 세 사람의 그림자를 짙게 드리웠습니다. 그런데 두 사람의 그림자는 함께 포개져 있었고 고개를 잔뜩 숙인 한 사람의 그림자는 뒤처져 무겁게 끌리고 있었습니다.
당시 낙양의 지가를 올리던 박찬호가 한국인 에이전트 스티브 김에서 '수퍼 에이전트' 스캇 보라스의 품으로 떠난다는 소식을 발표하던 그 날이었습니다.
스티브의 사무실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박찬호는 "이제 스티브 형이 보라스씨와 함께 나를 위해 공동 에이전트로 일하게 됐다"고 힘줘 강조했습니다. 하지만 그 말을 믿는 사람들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대외적으로만 형식상 공동 에이전트였지, 내용적으로 스티브는 자신의 가장 큰 고객을 위해 본연의 업무를 할 게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것으로써 메이저리그 사상 최초의 한인 선수-에이전트의 궁합은 막을 내렸습니다.
지난해 이맘 때 박찬호는 보라스와 전격 결별했습니다. 그리고 바로 다음날 또 하나의 수퍼 에이전트 제프 보리스를 찾아갔습니다.
박찬호는 이번엔 베벌리힐스의 보리스 사무실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보라스와 헤어지게 된 이유를 밝혔습니다. "마음 편히 일을 맡기기가 힘들어졌다. 구체적인 것은 밝히고 싶지 않다."
박찬호가 스티브에서 보라스로 다시 보리스로 에이전트를 옮겨가는 과정은 비슷하면서도 다르고, 다르면서도 비슷해 공교롭습니다.
스티브에서 보라스로 간 것은 내용적으로도 해고의 모양새를 갖췄습니다. 당시 '블루칩' 박찬호에겐 메이저리그에 진출한 가장 큰 목표를 눈앞에 두고 더욱 경험 많고 강력한 대리인이 절실했습니다.
하지만 라스트 네임이 '아' 발음 하나 다른 보리스로 옮겨간 모습은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스스로 밝혔듯이 보라스한테 홀대를 받은 게 역력한 탓입니다. 바로 '보라스 사단 내에서 소외'입니다.
보라스는 여느 해와 마찬가지로 당시도 바쁘기 짝이 없는 오프시즌이었습니다. 마쓰자카 다이스케와 배리 지토 등 '빅딜' 고객들이 수두룩했습니다. 이러다 보니 박찬호는 뒷전이었고 스프링캠프를 보름여도 채 안남겨둔 시점에 이르도록 미계약자의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박찬호는 에이전트를 해고했던 선수에서 바로 에이전트가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는 그래서 버림받는 보통 선수가 돼버린 것이었습니다.
조영남이 젊은 시절 불러서 히트를 쳤던 팝송이 있습니다. 그룹 C.C.R의 프라우드 메리(Proud Mary)를 번안한 노래 제목이 아마 '돌고 도는 물레방아 인생'이었던가요?
정말 삶은 돌고 도나 봅니다. 박찬호가 스티브에서 보라스로 다시 보리스로 에이전트를 옮겨다니는 모습이 영락없이 물레방아 인생의 뒷면입니다. 다만 세월의 흐름은 누구도 피해갈 수가 없어 주객만 뒤바뀌었을 따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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