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전과 백업의 차이를 거의 느낄 수 없게 하는 탄탄한 선수층이 두산 선전의 가장 큰 원동력으로 꼽히고 있다. 하지만 가을 야구는 단순히 전력만 가지고 결과물을 낼 수 없는 특별한 시리즈다. 팀을 하나로 묶는 무언가를 가지지 못한 팀은 결코 포스트시즌서 인상적인 경기를 할 수 없다.
두산을 버티게 하는 정신적 힘의 중심엔 두 명의 대표적인 고참 선수들이 자리 잡고 있다. 모든 선수들의 마음이 ‘어쩌면 이 멤버로는 마지막일 수 있는 도전’이라는 절실함 아래 똘똘 뭉쳐 있는 것이 지금의 두산이다. 그리고 손시헌과 정재훈이 투.타에서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주며 구심점 역할을 하고 있다.
손시헌과 정재훈이 빛나는 이유는 그들이 처음부터 가을의 주역은 아니었다는 점에서 출발한다.
손시헌은 9월 허리 부상 이후, 팀의 주전 유격수 자리를 김재호에게 내줬다. 플레이오프까지 그는 거의 기회를 얻지 못했다.
하지만 벤치에 앉아 있는 순간에도 그는 가장 앞 자리에서 파이팅을 냈다. 처음엔 그도 자신이 그런 상황에 놓이게 될 거라 생각해보지 못했다고 했다. 하지만 그 자리에서 자신이 힘을 더 내야 팀이 활력을 가질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고 했다.
1차전서 드디어 기회를 잡은 손시헌은 솔로 홈런 포함 3안타 2타점으로 맹활약하며 팀을 승리로 이끌었고, 2차전서도 연장전서 귀주한 2타점을 추가하며 존재감을 알렸다.
포스트시즌이 끝나면 FA가 되는 선수다. 자신의 가치를 제대로 보여줄 수 있는 순간에 벤치만 지키고 있어야 한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손시헌은 전혀 내색하지 않았다. 오히려 잠시 자기 자신을 내려놓았다. 그런 희생은 지금 두산을 지키고 있는 가장 큰 힘이다.
정재훈은 포스트시즌서 ‘두산의 마무리 투수’라고 불렸던 선수다. 과거형을 쓴 이유는 그가 제대로 마무리 역할을 맡은 경기가 없었기 때문이다. 넥센과 준플레이오프 2차전서 1점차 앞선 9회말 마운드에 올라 안타 하나 맞고 교체된 것이 가장 마무리 투수에 근접한 등판이었다.
일반적으로 이런 케이스에 놓인 선수들은 불만을 먼저 갖게 된다. 겉으로 내색하지 않더라도 어떻게든 티가 나기 마련이다.
정재훈은 달랐다. 말로 다름을 보인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답했다. 팀을 위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각오를 마운드에서 보여줬다.
25일 삼성과 한국시리즈 2차전서 그는 1.2이닝 동안 삼진을 3개나 잡아내는 역투로 팀에 귀중한 1승을 안겼다. 1점도 내주면 안되는 연장 11회말, 그것도 1사 1,3루 위기에서 등판했지만 실점 없이 제 몫을 다해냈다. “팀을 먼저 생각한다”는 백 마디 화려한 말 보다 더 든든한 무언가를 안겨주는 역투였다.
아직 두산의 가을 야구는 끝나지 않았다. 결과가 어떻게 나올지는 여전히 장담할 수 없다.
하지만 결론이 무엇이건 이 가을, 두산의 야구가 보는 이들의 가슴 속에 묵직한 울림을 주었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