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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베로는 국제배구연맹(FIVB)가 1998년 팀 간 공을 주고받는 횟수를 늘려 박진감 있는 경기로 유도하기 위해 처음으로 도입됐다. 리베로는 규정상 서브·블로킹·스파이크 등 공격은 할 수 없다. 심지어 전위에서는 오버핸드 토스조차 할 수 없다. 이를 어기면 반칙으로 인정돼 상대 팀에 1점을 줘야 한다.
역할이 명확히 구분되는 만큼 같은 팀 선수와도 다른 색깔의 유니폼을 입는다. ‘수비’만 전문적으로 하는 선수인 탓에 공을 잘 받으면 본전이지만 못하면 더 많은 비판을 받는다. 경기 후 수훈선수 인터뷰에서도 좀처럼 모습을 보기 어렵다.
그런데 최근 V리그에서 화제의 중심에 선 리베로가 있다. 바로 남자프로배구 OK금융그룹 베테랑 리베로 부용찬(35)이다. 175cm 단신에 몸을 아끼지 않는 허슬플레이가 돋보이는 부용찬은 코트 위에서 누구보다 빛나는 존재감을 뽐낸다.
일단 외모부터 눈에 확 띈다. 국내 선수답지 않은 덥수룩한 수염에 머리띠가 그의 트레이드 마크다. 배구에 대해 잘 모르는 이들도 그를 보면 쉽게 잊을 수 없다.
부용찬의 존재감은 코트 위에서 더 빛난다. OK금융그룹은 지난 10일 장충체육관에서 리그 선두를 달리던 우리카드를 세트스코어 3-1로 누르고 4연승을 질주했다. 일본 출신 오기노 마사지 감독이 올 시즌 팀을 맡은 이후 최다 연승이다. 바로 직전 6연패를 당한 것을 감안하면 더 놀라운 반전이다.
하지만 오기노 감독이 꼽은 ‘진짜 주역’은 공격수 대신 궂은 일을 책임지는 부용찬이었다. 그는 “눈에 잘 띄진 않지만 부용찬을 칭찬하고 싶다”고 말했다. 이날 리시브 13개, 디그 12개를 기록한 부용찬은 원래 주장이었던 세터 이민규가 부상을 당한 뒤 임시 주장을 맡고 있다.
오기노 감독의 말은 무슨 의미일까. 부용찬은 동물적인 감각과 놀라운 순발력으로 상대 강스파이크를 걷어 올린다. 플로터 서브(머리 위에서 넘기는 무회전 서브)에 대한 리시브는 상대적으로 떨어진다는 평가를 받았다. 3라운드 중반까지는 동료 리베로 조국기가 리시브를 주로 전담했다.
팀이 연패에 빠지자 오기노 감독은 3라운드 막판부터 변화를 줬다. 부용찬을 리시브에도 투입하기 시작했다. 이는 대성공이었다. 오기노 감독은 “부용찬이 들어오면서 서브 에이스 허용이 줄었고 리시브 범위에 대한 이야기도 잘해주고 있다”고 칭찬했다.
특히 오기노 감독은 부용찬이 경기 외적으로 팀에 미치는 영향이 크다고 강조했다. 그는 “부용찬은 하려고 하는 의지가 강해 다른 선수들도 잘 따라오는 것 같다”며 “리베로는 선수들에게 목소리를 내면서 커뮤니케이션 역할도 해야 하는데 부용찬이 잘해주고 있다”고 평가했다.
“남자만의 대화였다”며 잠시 쑥스러워한 부용찬은 “레오가 좀 힘들어하는 것 같아 얘기를 들어주려고 했다”고 말했다. 그는 “레오에게 대화를 나누면서 ‘책임감을 더 가져달라’고 부탁했는데 이후 레오는 훈련에서 달라졌다. 심지어 그날 저녁 우리에게 저녁을 사기도 했다”며 “레오가 책임감이 더 많이 생겼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돌아봤다.
동료 선수들도 팀 분위기 전체가 많이 좋아졌음을 느낀다. 토종 공격수 차지환은 “6연패 할 때는 우리끼리 탓하기 바빴다”면서 “지금은 서로 잘한 걸 얘기하면서 격려하는 분위기다”라고 전했다.
부용찬은 “역할이 더 늘었다는 것은 선수에게 기분 좋은 일이다”며 “감독님은 팀에 파이팅을 넣기를 원하고, 플레이 상황에서 (누가 공을 받을지)콜 사인을 강조하는데 나도 그 부분에 동의한다”고 말했다.
이어 “연승은 좋은 일이다. 내가 들어가서 연승한다기보다 레오가 잘해주고 있어 더 기분 좋다”며 “선수들 마음가짐이 달라지면서 서로 시너지 효과를 내는 것 같아서 고무적이다”라고 말한 뒤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