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구소녀’ 한지은(20)은 인터뷰를 하는 내내 환하게 웃었다. 영락없는 보통의 20살 소녀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큐를 잡고 당구대 앞에 서는 순간 표정은 전혀 달라졌다. 마치 먹이감을 앞에 둔 맹수처럼 공을 노려보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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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지은은 지난 7월 강원도 원주에 인터불고 호텔에서 열린‘2021 월드 3쿠션 그랑프리’ 대회에 참가했다. 토브욘 브롬달(스웨덴), 딕 야스퍼스(네덜란드), 다니엘 산체스(스페인) 등 ‘당구 4대 천왕’이라고 부르는 세계적인 남성 선수들과 핸디캡 없이 경쟁했고 승리를 챙기기도 했다. 비록 조별리그를 통과하진 못했지만 그 대회에서 가장 눈길을 사로잡은 선수였다.
한지은은 당시 대회 기억을 떠올리며 “그 시합을 통해 에버리지를 비롯해 많은 부분에서 성장했다는 것을 느꼈다”며 “워낙 세계적인 선수들이다보니 함께 게임을 하는 것은 물론 경기하는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공부가 많이 된 것 같다”고 말했다.
한지은의 롤모델은 브롬달이다. ‘당구 4대 천왕’ 가운데서도 가장 먼저 손꼽히는 전설이다. 1987년부터 2019년까지 30여년에 걸쳐 세계선수권대회를 6번이나 우승을 차지했다. 60을 바라보는 나이임에도 여전히 건재함을 과시한다.
지난 그랑프리 대회에서 브롬달의 경기를 직접 볼 수 있었던 것은 큰 선물이었다. 많은 나이에도 당구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계속 실력을 키우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보면서 많은 것을 깨달았다.
한지은은 “브롬달은 모든 일을 할 때 열정적이고 마치 아이처럼 당구를 좋아한다”면서 “당구를 40~50년을 쳤는데도 그렇게 열심히 하는 모습을 보니 너무 존경스러웠고 배워야겠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고 밝혔다.
한지은이 세계 당구계에서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2019년 8월이었다. 당시 18살이던 한지은은 미국 뉴욕에서 열린 ‘버호펜 오픈 3쿠션 토너먼트’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특히 결승에서 여자 3쿠션 당구의 절대강자인 세계랭킹 1위 테레사 클롬펜하우어(네덜란드)를 꺾은 것이 큰 화제가 됐다. 3연패를 노리던 클롬펜하우어의 독주를 저지한 것이었다.
한지은은 “어렸을 때 워낙 소극적이어서 먼저 당구를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며 “그런데 당구선수였던 사장님이 ‘한번 해보지 않겠냐’고 권유를 해주셨다. 며칠 고민하다 배우기 시작했는데 한 번 쳐보니까 너무 재밌었다”고 처음 당구를 시작했던 기억을 떠올렸다.
이어 “학교를 자퇴할 때 고민을 안한 것은 아니었다. 학교 친구들과 함께 지내지 못한다는 부분은 아쉬웠다”면서 “하지만 학교 수업을 마치고 당구 연습을 하다보니 항상 부족함을 느꼈기 때문에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다”고 털어놓았다.
물론 학업을 완전히 내려놓은 것은 아니다. 고교 자퇴를 한 뒤 곧바로 검정고시를 준비했고 1년도 안돼 합격증서를 받았다. 당구 선수로서 조금 더 경력을 쌓은 뒤 대학에 진학할 생각도 가지고 있다.
‘당구선수’ 한지은의 강점은 ‘포커페이스’다. 당구는 멘탈게임이다. 그래서 경기 중 표정을 통해 상대에게 마음을 읽히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한지은은 “어떤 상황에서도 표정이 바뀌지 않고 상대가 어떤 행동을 하던 신경 쓰지 않는 것이 내 강점이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멘탈이 자신의 약점이라 밝혀 눈길을 끌었다. 한지은은 “표정 변화는 없는데 실제 내 마음속은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다”며 “중요한 순간에 멘탈이 흔들려서 못 칠 때가 있어 그런 부분을 계속 보완해야 한다”고 말했다.
프로당구 PBA에서 활동하는 용현지와는 초등학교 때부터 절친이다. 용현지는 지난 추석 연휴에 열린 PBA 대회에서 준우승을 차지하며 주목받았다. 활약하는 무대는 서로 다르지만 용현지의 성공은 한지은에게도 큰 자극이 됐다.
한지은은 이제 더 높은 곳을 바라보고 있다. 오는 11월 7일부터 13일까지 네덜란드 베겔에서 열리는 3쿠션 당구 월드컵에 참가한다. 3쿠션 당구 월드컵은 코로나 사태로 인해 2020년 2월 터키 월드컵 이후 중지됐다가 21개월 만에 다시 열린다.
이번 대회는 한국 선수가 총 14명이 참가한다. 한국 3쿠션 간판스타 김행직과 최성원이 32강 본선에 직행하고 나머지 12명은 예선전을 치러 본선 티켓을 따내야 한다.
한국 선수 가운데 홍일점인 한지은도 예선 1라운드(PPPQ)부터 참가한다. 험난한 예선 과정을 뚫으면 본선에서 세계적인 선수들과 맞붙는다. 세계의 벽이 높기는 하지만 큰 무대에 나서 도전하는 것만으로도 어린 한지은에게는 큰 공부나 다름없다.
한지은은 “당장 본선에 올라 입상을 노린다기보다 내 실력 자체를 끌어올려 에버리지를 평균 1점 이상으로 올리는 것이 목표다”며 “시합을 하는 것 자체로도 좋은 훈련이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어떤 시합이든 진지하게 임할 생각이다”고 말했다.
아울러 “내가 처음 당구를 시작할 때만 해도 전국에 또래 선수가 5~6명밖에 안됐는데 요즘 어린 선수들도 많이 늘어났다”며 “그 선수들에게 ‘저 언니처럼 되고 싶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세계적인 선수가 되는 것이 목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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