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데일리 스타in 김보영 기자] 굿판을 보듯 화끈하고, 도깨비불처럼 매혹적이리라. 객석을 귀신에 홀린듯 황홀경에 빠뜨리는 134분. ‘검은 사제들’·‘사바하’의 세계를 독창적으로 계승하고, 장재현 감독의 내공과 상상력을 집대성한 K오컬트 종합선물세트. 영화 ‘파묘’(감독 장재현)다.
영화 ‘파묘’가 20일 언론시사회를 통해 마침내 베일을 벗었다. 영화 ‘파묘’는 거액의 돈을 받고 수상한 묘의 이장을 의뢰받은 풍수사와 장의사, 무속인들이 이 의뢰로 인해 기이한 일들에 휘말리며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린 오컬트 미스터리 영화다. ‘검은 사제들’, ‘사바하’ 등을 연출한 장재현 감독이 5년 만에 내놓는 신작이자, 최민식 김고은 유해진 이도현 네 톱배우의 데뷔 이래 첫 오컬트 장르 도전으로 주목받았다. ‘파묘’는 지난 15일(현지시간) 개막한 제74회 베를린국제영화제 포럼 세션에 초청돼 큰 화제를 모았다. 장르성이 강해 호불호가 갈리는 오컬트 장르의 한국 작품이 해외 영화제에 초청된 게 드문 일이기 때문. 또 무속신앙과 풍수지리, 음양오행 등 지극히 한국적이고 토속적인 소재를 전면에 내세워 많은 주목을 받았다.
나이는 어리지만 한국에서 톱 클래스로 꼽히는 무당 화림(김고은 분)과 그의 제자 봉길(이도현 분)이 미국에서 거액의 의뢰를 물어오며 이야기는 시작된다. 의뢰인은 미국에 사는 대부호. 대대손손이 부유해 대저택에서 남부러울 것 없이 사는 듯했으나, 실은 늙은 아버지부터 중년의 아들, 갓 태어난 손자까지 집안의 장손들이 대대로 말 못할 고통에 시달리고 있던 것. 화림과 봉길은 이 집안에 ‘묫바람’(조상이 묻힌 산소에 탈이 생겨 그로 인한 화가 후손들에게 전해지는 현상)이 든 것을 알아챈다. 두 사람은 오랜 기간 짝을 맞춘 비즈니스 파트너, 40년 경력의 풍수사 상덕(최민식 분)과 국내 최고 수준의 장의사 영근(유해진 분)을 이 일에 끌어들인다. 그렇게 네 사람은 산꼭대기 음습한 땅에 묻혀있던 대부호 가문의 할아버지 묘를 발견한다. 전국 각지의 묘를 수백 번 넘게 본 베테랑들도 겪어본 적 없는 험지이자 악지였다. ‘파묘’는 네 사람이 위험을 감수하고 묘를 이장하며 벌어지는 일들을 6부로 장을 나눠 전개한다.
동물을 죽여 신께 바치는 대살굿부터 풍수지리와 음양오행, 한국의 장례 관습 등 전통 무속신앙에서 비롯한 토속적 소재들이 곳곳에 등장한다. 해외 관객들에게는 생소하게 느껴질 수 있는 소재이나 장재현 감독은 클래식하면서도 세련된 연출로 소재가 낳을 수 있는 생경함을 어느 정도 상쇄시킨다. 알프레드 히치콕부터 신도 카네토, 나카시마 테츠야 등 해외 호러, 스릴러 거장의 명작들을 계승한 듯한 신들도 눈에 띈다. 형이상학적인 미지의 존재를 다루면서도, 이를 그려내는 방식은 지극히 현실적이며 땅과 맞닿은 장재현 감독만의 연출 철학이 ‘검은 사제들’부터 ‘사바하’를 걸쳐 ‘파묘’에도 어김없이 녹아 들었다.
가족이 마주한 묫바람과 묘 안에 묻힌 험한 것의 실체는 영화 중반부를 지나면서도 쉽게 예측하기 어렵다. 1부로 시작해 6부가 마무리될 때까지 의외성의 연속이며, 상덕을 비롯한 네 인물이 처한 상황들도 점점 더 극단으로 치달아 어지러이 춤춘다.
영화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굿판같고, 극 곳곳에 배치해둔 토속적 코드들은 혼을 쏙 빼놓는 도깨비불처럼 장면 장면을 빛낸다.
데뷔 이래 처음 오컬트 장르에 도전한 네 배우들의 명연기와 앙상블도 폭발적이다. 각자의 색채가 강해 이질적일 것 같던 네 캐릭터들이 극 중에선 물론 작품의 기능적인 면에서도 기묘하고 화끈한 팀플레이를 펼친다. 가장 먼저 눈길을 끄는 건 무속인 역할에 도전한 김고은과 이도현이다. 영화 초반 화림(김고은 분)이 묘 앞에서 펼치는 5분에 걸친 ‘대살굿 시퀀스’는 ‘파묘’에서 빼놓을 수 없는 백미다. 피를 토하듯 울부짖으며 칼춤을 추는 김고은의 새로운 모습이 소름을 넘어 경이로움을 자아낸다. 화림과 봉길(이도현 분), 영근(유해진 분) 세 사람이 영안실에서 도망 나간 넋을 붙잡는 굿을 하는 장면도 섬뜩함과 긴장을 자아낸다. ‘파묘’가 스크린 데뷔작인 이도현도 성공적으로 신고식을 치렀다. 혼령이 깃든 몸으로 주문처럼 저주를 쏟아내며 경기를 일으키는 이도현의 연기는 스크린 데뷔란 사실이 믿어지지 않을 만큼 노련하다. 이 이상 더 보여줄 새로운 모습이 있을까 싶었던 최민식은 모두의 예상을 보란듯이 깨고 ‘파묘’에서 또 한 번 인생캐릭터를 경신했다. 6부에 걸친 ‘파묘’의 지난한 과정을 든든히 잡아주는 중심이자 기둥으로서 이 영화의 처절한 최종 클라이맥스를 견인한다. 유해진의 연기는 영화적 체험에서 없어선 안 될 ‘친숙함’과 ‘현실성’을 담당한다. ‘파묘’의 숨 쉴 구멍으로 위트와 재치를 담당하며 관객의 생각을 대변하는. 발이 가장 땅에 맞닿는 인물인 ‘영근’을 충실히 표현해냈다.
‘파묘’는 무속신앙을 전면에 내세웠으나 기독교 및 불교적 색채와 동물들의 상징적 배치 등 장재현 감독 전작들의 정취를 느낄 수 있는 장면도 많다. 탈종교화한 현대와 전통 신앙의 대립적 공존, 인간과 신을 이어주는 ‘무속인’을 향한 시선 등 장재현이 오랜 기간 오컬트를 천착하며 발견한 사회의 단면들이 엿보인다.
우려되는 건 호불호다. 험한 것의 정체가 드러나는 후반부 전개가 실험적이고 파격적이라 이를 둘러싼 반응이 극과 극이 될 전망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정통 무속신앙 오컬트를 기대했던 일부 관객들은 실망할 수도 있다. 민속학의 발자취를 더듬는 과정에서 우리 민족의 아픈 과거와 한, 뿌리를 담은 역사적 요소와 괴담도 등장한다. 이 역사적 코드가 한의 정서와 여운을 선사할 수도, 경우에 따라 사족처럼 느껴질 가능성도 있지만 버겁지는 않다. 오컬트 외길 인생, 장재현 감독의 제대로 작두 탄 굿 한 판이 반갑게 느껴지는 이유다. 22일 개봉. 15세 관람가. 134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