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데일리 김성진 기자] 최윤범 고려아연 회장의 2조5000억원 규모 유상증자 승부수가 시장을 충격에 빠뜨리며 경영권 분쟁 승패가 법원과 금융감독당국의 판단에 갈릴 가능성이 커졌다. 고려아연은 앞서 진행한 자사주 공개매수가 재무구조에 악영향을 끼치지 않는다고 밝혔지만, 사실상 이 과정에서 늘어난 차입금을 유증으로 메우려고 한다는 비판이 일면서다. MBK·영풍 연합은 신주발행금지 가처분 신청 등 법적 조치에 나설 것을 예고한 상태며, 금융감독원은 “부정거래 등 위법 혐의가 확인되는 경우 해당 회사뿐만 아니라 관련 증권사에 대해서도 엄중히 책임을 물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 최윤범 고려아연 회장이 지난 2일 서울 용산구 그랜드하얏트에서 열린 영풍과 MBK와의 경영권 분쟁 관련 기자회견에서 발언을 하던 중 목을 축이고 있다.(사진=뉴스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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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일 고려아연 주가는 전일 대비 7.68% 빠진 99만8000원에 마감했다. 전날 하한가를 기록한 데 이어 이틀 연속 급락을 이어간 것이다. 이틀 동안 증발한 시가총액 규모만 약 11조3000억원에 달한다. 이날 오후 열린 금감원의 긴급 브리핑 자리에서 함용일 부원장은 고려아연 사태에 대해 “회계처리 기준 위반 개연성이 높은 다수의 회계처리 사실을 확인했다”며 “정식 감리 전환 여부를 조속한 시일 내에 결정하겠다”고 밝혔다.
함 부원장은 △증자의 목적과 배경 △회사와 기존 주주에 미치는 영향 △근본 증자가 공개 매수 시 밝힌 주주가치 제고에 부합되는지 여부 △관련 의사결정 과정이 투명하게 기재되어 있는지 여부 등을 철저히 심사하겠다는 뜻도 전했다. 그는 특히 “공개매수 기간 중 유상증자를 동시에 추진한 경위를 살펴볼 것”이라고 강조했다.
고려아연은 앞서 자사주 공개매수(10월4~23일)를 실시하며 “회사의 재무구조에 변경을 가져오는 장래계획은 수립하고 있지 않다”고 했지만 사실상 이 기간에 미래에셋을 주관사로 선정하고 유상증자 실사를 진행한 것으로 나타났다. 경영권을 지키기 위해 공개매수를 진행하며 2조원이 넘는 자금을 조달했는데, 이를 주주들 자금으로 메우려 했다는 의혹을 피할 수 없게 된 것이다. 금감원은 이날 바로 미래에셋 현장 조사에 착수하며 발빠른 대처에 나섰다.
고려아연은 이번 유증과 관련해 “일반공모를 통해 ‘국민기업’으로 도약을 추진할 것”이라고 그 취지를 밝혔지만 사실상 경영권 방어 목적 이뤄진 측면이 크다. 우리사주에 20%를 우선 배정하는 방식의 유증이 완료되면 기존 주주의 지분율이 희석되는 동시에 최 회장 측 지분이 MBK·영풍 연합의 지분율을 앞서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MBK는 “신주발행금지 가처분을 비롯해 모든 법적 조치를 면밀히 검토하고 있다”며 곧 법적 조치에 나설 계획을 밝혔다.
업계에서는 이번 사태가 과거 2003년 ‘현대엘리베이터-KCC 경영권 분쟁’과 유사하다는 분석을 내놓는다. 당시 현대엘리베이터는 경영권 방어를 위해 일반공모 방식의 유증을 결의했는데, 당시 법원은 해당 증자가 경영권 유지·방어에 목적이 있다며 KCC 측의 가처분 신청을 인용한 바 있다. 현대엘리베이터는 당시 고려아연과 마찬가지로 청약 한도(1인당 300주)를 제한하기도 했다.
법원과 금감원이 어떤 판단을 내리느냐에 따라 이번 경영권 분쟁 판도는 확 바뀔 것으로 예상된다. 유증이 성공한다면 최 회장의 경영권 방어 가능성이 높지만, 만약 실패로 돌아갈 경우 MBK·영풍이 현재 지분율 3%포인트의 우위를 앞세워 임시 주총 표 대결에서도 우세를 점할 것으로 관측된다.
특히 캐스팅보트로 지목되는 국민연금을 비롯해 기관투자자들의 표심도 법원과 금감원의 판단에 상당한 영향을 받을 것으로 보인다. 국민연금은 9월30일 기준 고려아연 주식 154만8609주(7.48%)를 갖고 있다고 공시해 3개월 전 대비 0.35% 매각한 것으로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