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우디 언론인 암살 의혹 후폭풍 '일파만파'(종합)

트럼프 "가혹한 처벌" 언급에 사우디 "더 큰 앙갚음" 경고
美의회 "사우디 제재해야"…英·佛·獨, 사우디에 진상규명 촉구
서방국 vs 중동 확전 가능성…"전세계 위기로 확대될 수도"
글로벌 기업, 사우디와 거리…국제행사 불참 선언 잇따라
사우디 증시 폭락하고 국제유가 급등
  • 등록 2018-10-15 오후 4:44:30

    수정 2018-10-15 오후 4:44:30

모하메드 빈 살만(왼쪽) 사우디아라비아 왕세자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지난 3월 20일 미국 백악관 집무실에서 얘기를 나누고 있는 모습. (사진=AFP PHOTO)
[이데일리 방성훈 기자] 사우디아라비아 언론인 자말 카슈끄지 암살 의혹에 따른 후폭풍이 거세다. 세계 최대 경제 규모를 자랑하는 미국과 최대 산유국 간 갈등 양상으로 번지고 있어서다. 유럽 주요 국가들은 사우디에 책임을 물으며 미국을 지원하고 나섰다. 자칫 서방국가들과 중동 산유국들 간 충돌로 확전될 가능성도 있다. 미국과 중국 간 무역전쟁에 이어 글로벌 정세를 뒤흔들 또다른 변수가 될 전망이다.

사우디 외무부는 14일(현지시간) 성명을 내고 “어떤 행동이든 우리를 위협한다면, 그 크게 갚아줄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러면서 “경제적 제재를 가하겠다는 위협, 정치적 압박, 허위 의혹 반복 제기 등 사우디를 향한 어떠한 위협이나 음해 시도도 전면 거부한다”고 덧붙였다. 사우디 외무부는 또 “사우디는 아랍, 이슬람권의 지도국으로 역사적으로 중동 및 국제사회 안정과 안보 확립에 앞장섰다”면서 “석유가 풍부한 왕국 사우디의 경제는 세계 경제에 있어서도 영향력이 크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우리 경제는 오직 세계 경기에 의해서만 영향을 받는다”고 강조했다.

이날 성명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전날 사우디 정부가 자국 언론인 자말 카슈끄지를 암살했다는 의혹이 사실로 드러날 경우 “가혹한 처벌”을 가하겠다고 말한 뒤 나온 것이다. 자국에 어떤 형태든 제재를 가할 경우 더 크게 보복하겠다고 경고한 것이다. 뉴욕타임스는 “트럼프 대통령의 ‘가혹한 처벌’ 발언으로 사우디와의 새로운 갈등이 시작됐다”고 진단했다.

카슈끄지는 지난해 9월부터 미국에 체류하면서 워싱턴포스트에 사우디 왕실과 정책을 비판하는 칼럼을 게재해 왔다. 터키인 약혼녀와 결혼하기 위해 이스탄불을 찾았던 그는 지난 2일 사우디 총영사관에 들어가는 모습이 담긴 동영상을 마지막으로 행방이 묘연해진 상태다. 터키에선 카슈끄지가 사우디 왕실 지시로 영사관에서 정보요원들에 의해 살해됐다는 의혹이 제기됐지만, 사우디 정부는 배후설을 전면 부인하고 있다.

지난 2일(현지시간) 터키 이스탄불에서 실종된 사우디아라비아 언론인 자말 카슈끄지. (사진=AFP PHOTO)
그러나 정황상 사우디 정부 소행일 가능성이 높다는 게 중론이다. 이에 미국 의회에선 사우디에 제재를 가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영국, 독일, 프랑스 등 유럽 주요 3개국도 미국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제러미 헌트 영국 외무장관, 장이브 르드리앙 프랑스 외무장관, 하이코 마스 독일 외무장관은 트럼프 대통령의 제재 가능성 언급 이후 공동성명을 발표하고 “카슈끄지 실종과 관련해 진실을 규명해야 한다(light must be shed). 이를 위한 신뢰할만한 조사가 필요하다. 관련이 있다면 누가 책임을 져야 하는지 알아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들 장관은 관련 내용을 사우디 정부에 전달했다고 설명한 뒤, 조사를 위해 사우디와 터키의 공동 노력을 다시 한 번 촉구하고 “사우디 정부가 철저하고 세밀하게 대응하길 기대한다”고 밝혔다.

사우디 정부는 ‘사실무근’임을 거듭 강조하며 정면돌파를 예고했다. 살만 빈 압둘라지즈 사우디아라비아 국왕과 레제프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은 이날 전화통화를 갖고, 사건 조사를 위한 공동수사팀 구성이 중요하다는데 의견일치를 이뤘다. 아랍뉴스 등은 살만 국왕이 이날 통화에서 에르도안 대통령에게 “누구도 사우디와 터키의 관계에 영향을 끼치지 못할 것”이라고 밝혔다고 전했다. 에르도안 대통령은 양국 관계 강화를 위한 살만 국왕의 뜻에 감사를 표한 것으로 알려졌다.

사우디가 엄포를 놓은 것처럼 갈등이 확산될 경우 경제적 여파도 상당할 것으로 관측된다. 사우디 국영방송 알 아라비야는 이날 사우디가 각종 제재에 대응하기 위해 취할 수 있는 30가지 이상의 조치를 마련했다고 보도했다. 여기엔 석유와 무기 판매, 미국과의 정보 교환, 이란과의 화해 가능성 등이 포함된 것으로 알려졌다. 향후 미국 등이 사우디에 제재를 가할 경우 국제 사회에 더 큰 파장을 불러일으킬 수 있음이 확인되는 대목이다.

이 방송의 사장인 투르키 알다크일은 “미국이 사우디에 제재를 부과할 경우 전 세계가 경제적 재앙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국제유가는 200달러까지 치솟을 수 있다”면서 “사우디에 어떤 제재를 가하더라도 실패로 돌아갈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는 트럼프 대통령이 전날 “사우디에 군사장비 판매를 중단하거나 취소하는 것은 스스로 미국을 처벌하는 것”이라는 발언을 인용하며 “미국 스스로 자국 경제를 죽음으로 몰아넣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다만 그는 이후 트위터를통해 “사우디 정부의 공식 입장이 아닌 개인적 견해”라고 해명했다.

사우디아리비아 언론인 자말 카슈끄지 암살에 의혹을 품은 시위자들이 지난 10일(현지시간) 미국 워싱턴DC 사우디 대사관 앞에서 항의하고 있다. (사진=AFP Photo)
파문이 커지면서 글로벌 기업들도 사우디와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JP모건의 제임스 다이먼 최고경영자(CEO)와 포드 자동차의 빌 포드 회장이 사우디에서 열리는 투자 행사 미래투자이니셔티브(FII)에 불참하기로 했다. FII는 사우디 국부펀드인 공공투자펀드(PIF) 주최로 열리는 행사로 ‘사막의 다보스’라 불린다. 오는 23일부터 사흘 간 사우디 수도 리야드에서 열릴 예정이다.

JP모건과 포드 측은 이번 불참 통보에 대한 이유는 밝히지 않았으나, 카슈끄지 살해 의혹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고 로이터통신은 분석했다. 아울러 CNN, 파이낸셜타임스, 뉴욕타임스, CNBC, 블룸버그 등 서방 주요 외신들도 이날 사우디 측에 행사 불참을 통보했다고 통신은 덧붙였다.

앞서 우버의 다라 코스로샤히 CEO, 버진그룹의 리처드 브랜슨 회장, 거대 콘텐츠 회사인 비아콤의 밥 배키시 CEO, AOL 공동창업자인 스티브 케이스 등도 불참을 선언했으며, 김용 세계은행 총재도 참석지 않겠다고 전했다.

한편 트럼프 대통령의 제재 가능성 시사 이후 이날 사우디 타다울지수는 전일대비 264.21포인트(3.51%) 급락한 7266.59에 마감했다. 국제유가도 급등했다. 런던 선물거래소(ICE)의 브렌트유 12월물은 현지시간으로 14일 밤 개장 직후 전 거래일보다 1.9% 오른 배럴당 81.87달러까지 올랐다. 15일 새벽에도 전 거래일 종가보다 1.4% 높은 81.54달러에 거래되고 있다.

유가 전문가 게리 로스 블랙골드 대표는 파이낸셜타임스에 “사우디의 성명은 이례적”이라며 “사우디가 원유시장에 영향을 줄 직접적 조치를 취할지 불분명하지만, 세계 최대 산유국이 근육을 과시했으니 바로 반사적 반응이 나오고 있다”고 설명했다. CNBC는 “카슈끄지 실종 사건이 위기로 확대될 수 있으며, 그 영향은 전 세계에 미칠 수 있다”고 우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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