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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역법 88조 1항은 현역 입영을 받은 사람이 정당한 사유 없이 입영일 등에 일정 기간(현역입영 3일)이 지나 입영하지 않으면 3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거꾸로 말하면 정당한 사유가 있으면 병역을 거부할 수 있다는 얘기다.
양심적 병역거부=정당한 병역거부
대법원 이날 먼저 병역법상의 정당한 거부 사유와 관련, “병역법은 병역의무를 감당할 수 있는 사람에 대해 그에 합당한 병역의무를 부과함으로써 과도한 부담이 되지 않도록 하고 있다”며 “병역의무자가 처한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사정이 그로 하여금 병역의 이행을 감당하지 못하도록 한다면 정당한 사유에 해당할 수 있다”고 했다.
이는 병역의무자가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의 병역이행 의무 부과를 거부했다면 그 경우는 ‘정당한 병역법상의 거부사유’에 해당한다는 의미다. 그런데 대법원은 이날 다수의견을 통해 “진정한 양심적 병역거부자에게 형사처벌 등 제재를 통해 집총과 군사훈련을 수반하는 병역의무의 이행을 강제하는 것은 양심의 자유에 대한 과도한 제한이 되거나 양심의 자유의 본질적 내용에 대한 위협이 된다”고 판결했다.
근본적으로는 국가의 안보보다 개인의 자유를 중시하는 바뀐 시대상에 대법원이 응답한 것으로 풀이된다. 최근 하급심에서는 양심적 병역거부에 대한 대법원의 ‘유죄 판례’에도 불구하고 무죄 판결이 이어졌다. 지난 6월에는 또다른 최고법원인 헌법재판소가 양심적 병역거부자를 위한 대체복무제를 도입하라는 전향적 결정을 내놨다. 이번 대법원은 과거와 달리 김명수 대법원장을 필두로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창립멤버인 김선수 대법관과 진보성향 판사 모임인 ‘우리법연구회’ 출신 노정희 대법관 등 진보성향 대법관이 여러 포진해 있다.
실제 대법원은 이날 “자유민주주의는 다수결의 원칙에 따라 운영되지만 소수자에 대한 관용과 포용을 인정해야만 그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다”며 “국민 다수의 동의를 받지 못했다는 이유로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의 존재를 국가가 언제까지나 외면하고 있을 수는 없다”고 밝혔다.
“주관적 사정 정당하지 않아” 반대의견도
다만 김소영·조희대·박상옥·이기택 대법관은 다수의견과 다른 반대의견을 내놨다. 이들은 “종교적 신념 등을 이유로 한 양심적 병역거부와 같이 개인적인 신념이나 가치관, 세계관 등과 같은 주관적 사정은 정당한 사유에 해당할 수 없다”며 “기존 법리를 변경해야 할 만한 명백한 규범적, 현실적 변화도 없다”고 밝혔다.
하지만 다수의견은 대체복무제 도입 문제와 양심적 병역거부의 형사처벌 여부는 별개의 문제라 했다. 대법원은 “현재 대체복무제가 마련돼 있지 않다거나 향후 도입될 가능성이 있더라도 병역법 위반으로 기소된 피고인에게 정당한 사유가 인정된다면 처벌할 수 없다”고 판시했다.
임지봉 서강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이번 대법원 판례 변경은 어느 정도 예견된 일이었다”며 “헌재에서 병역법 처벌 조항이 합헌이라는 결과가 나왔지만 실제 내용으로 보면 위헌이었다”고 말했다.
헌재는 병역법상의 처벌조항인 제88조 제1항에 대해 재판관 4(합헌)대 4(일부 위헌)대 1(각하)로 합헌 결정을 내렸다. 하지만 위헌 4명의 의견 중 2명(강일원, 서기석)재판관도 양심적 병역거부가 병역법상의 ‘정당한 사유’에 해당한다고 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