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량용 반도체 시장을 선점하기 위한 한국과 미국, 일본 반도체 업계의 물밑 싸움이 치열하다. 차량용 반도체는 향후 반도체 업계를 먹여 살릴 차세대 시장이다. 차량 한대에 들어가는 반도체는 스마트폰의 100배 이상이다. 수요는 무궁무진하다. 차량용 반도체를 선점한 자가 미래 반도체 시장의 주인이 된다. 저마다 사활을 걸고 있는 이유다.
삼성전자는 잇따라 차량용 D램과 낸드플래시를 선보이고 있다. 지난 2월 삼성전자는 세계 최초로 256GB급 자동차용 낸드플래시 양산에 성공했다. 4월에는 10nm급 공정을 기반으로 자동차용 16Gb LP DDR4X D램 양산을 시작했다.
D램과 낸드플래시 앞에 ‘차량용’이란 수식어를 붙이기 위해선 고난도의 기술이 필요하다. 고온과 냉온 상태를 견딜 수 있어야 한다. 섭씨 150도의 고온과 영하 40도의 냉온 상태에서도 정상적으로 작동할 수 있느냐가 관건이다. 현재 삼성전자는 업계 최초로 ‘오토그레이드 1(Autograde1, -40도~125도)’ 기준을 만족한 D램을 양산하고 있다. 독일의 자동차업체 아우디에 자동차용 프로세서(AP)인 ‘엑시노트 오토’도 납품하고 있다. 아우디 차량 내부와 인포테인먼트 제어하는 역할을 한다.
삼성전자가 가장 공을 들이는 건 자체 GPU(Graphic Processing Unit, 그래픽카드 칩) 개발이다. GPU는 미래 자동차 성능인 자율주행자동차의 두뇌로 불린다. 자율주행 차량은 스스로 주변 환경을 인식하고 위험을 판단하고 주행 경로를 계획해야 한다. 방대한 데이터를 최단 시간 내에 동시다발적으로 처리하는 능력이 필수적이다. 기존의 CPU(중앙처리장치)는 빠른 판단과 연산능력을 자랑하지만, 동시에 수많은 정보를 한꺼번에 처리는 능력은 GPU를 따라가지 못한다. GPU가 자율주행 차량의 핵심 반도체로 부상하는 이유다.
그간 삼성전자는 필요한 GPU 기술을 영국의 반도체설계회사 ARM에서 사다 썼다. 라이선스 계약을 맺고 필요한 기술을 적용해 AP칩 등에 적용했다. 삼성은 전략을 바꿨다. GPU를 자체 개발하는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차량용 반도체 시장의 두뇌 역할을 담당하는 GPU 시장에서 손 놓고 있을 수 없다는 절박함이 깔렸다.
SK하이닉스 역시 지난 2016년부터 오토모티브(Automotive) 전략팀을 구성해 차량용 반도체 시장 진출을 준비하고 있다. SK하이닉스 관계자는 “현재 일부 전장 업체에 전장용 메모리 공급을 논의하는 등 초기 시장 기반 마련을 진행 중에 있다”고 밝혔다.
차량용 반도체로 ‘권토중래’ 노리는 일본
차량용 반도체 분야에서 가장 적극적인 행보를 보이는 곳은 일본이다. 일본의 시스템반도체업체 르네사스일렉트로닉스는 최근 미국의 반도체설계업체인 인티그레이티드디바이스테크놀로지(IDT)를 인수를 추진하고 있다. 인수금액은 6600억엔(약 6조6000웍) 수준. 일본 반도체 기업 인수합병(M&A) 역사상 최대 규모다. IDT는 통신용 반도체 설계업체지만, 최근 차량용 반도체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곳이다.
히타치, NEC. 미쓰비시 등 적자에 빠진 일본의 반도체업체 3사가 합쳐져 만들어진 르네사스는 차량용 반도체에 모든 것을 걸었다. 이미 르네사스는 차량용 반도체 분야에서 세계 2위로 올라섰다. 일본 경제주간지 주간동양경제는 “르네사스의 차량용 반도체는 40나노(1나노는 10억분의 1미터)급 미세 공정 기술을 확보해, 아직 90나노급에 머물고 있는 경쟁사들에 비해 크게 앞서 있다”고 보도했다. IDT까지 인수하면 더 앞서 갈 수 있다는 계산이 깔렸다.
모든 차에 ‘인텔 인사이드’ 붙인다..야심찬 목표
미국도 차량용 반도체 시장에 공을 들인다. 세계 최대 비메모리 반도체업체인 인텔도 독자적인 GPU 개발을 진행하고 있다. 인텔의 경쟁사인 AMD에서 GPU 관련 인재도 영입했다. 과거 인텔은 GPU를 내놓은 적이 있지만, 지난 2010년 생산을 중단했다. 시장 크기가 미미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상황이 달라졌다. GPU는 자율주행 차량의 두뇌로 통한다. 인텔이 뛰어들지 않을 이유가 없다.
인텔은 지난해 3월에는 자동차 카메라 시스템을 만드는 모빌아이를 무려 153억달러(약 17조2000억원)에 인수했다. 지난해 1월에는 디지털 지도 및 위치기반 서비스 제공업체인 히어의 지분 15%도 매입했다.
인텔은 컴퓨터에 ‘인텔 인사이드’ 로고가 들어간 것처럼 자동차에도 ‘인텔 인사이드’를 넣겠다는 야심찬 목표를 세웠다. 브라이언 크르자니치 인텔 최고경영자(CEO)는 “인텔이 자율주행의 미래를 가속화할 것”이라고 호언장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