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얼개'로 비춰내는 인생의 본질...색면추상 화가 전지연

인간의 양면성과 닮은 '얼개', 치유와 희망의 메세지 던져
"솔직하고 거짓 없는 작가가 되고 싶다"
  • 등록 2018-09-19 오후 3:37:23

    수정 2018-09-19 오후 6:00:27

전지연 작가가 한남동 갤러리 비선재에서 자신의 작품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다.
[이데일리 뷰티in 문정원 기자]인터뷰 : 김재홍 이데일리 뷰티in 편집장ㅣ 정리·사진 : 문정원 기자

내려놓지 못하고 비어낼 수 없는 사회다. 뒤쳐지지 않고 생존하기 위해 더욱 소유해야 하며, 소유 뒤에는 더 많은 욕심이 찾아온다. 욕심으로 점철된 인생은 푸석푸석해지고 그 사회는 회색과 검은 빛으로 멍들어간다. 안타깝지만 위로와 치유가 필요한 2018 대한민국의 단면이자 자화상이다. 일상에서 오는 소소한 기쁨과 행복을 느낄 여유 조차 없이 바쁘게 돌아가는 대한민국에서 인간의 모습과 닮은 ‘얼개’를 매개체로 한 미술작품으로 치유의 시간을 선사하는 작가가 있어 주목된다. 자격지심이나 계산 없이 그냥 주고 싶고, 그냥 받아도 기분 좋은 세상을 만들어가고 싶다는 한국의 대표적인 색면추상 화가인 전지연 작가가 그 주인공이다.

[이데일리]는 오는 20일까지 ‘Serendipity(뜻밖의 기쁨)’란 타이틀로 개인전을 열고 있는 전지연 작가를 서울 용산구 한남동의 갤러리 비선재에서 지난 13일 만났다. 10년 가까이 ‘얼개’라는 소재를 통해 색(色)과 면(面)의 추상회화로 희망의 메시지를 전해온 전 작가의 작품 세계와 그가 살아온 길에 대해서 들어봤다.

-현재 개인전 ‘세렌디피티’가 진행 중이다.

“내가 해야만 하는 수많은 역할들이 있는 상황에서 급하게 잡힌 전시였기 때문에 마음에 부담감이 더 컸다. 마음 속에서 ‘너무 힘들다’란 생각이 많아서 슬럼프처럼 어려움이 왔지만, 인내를 하고 나니까 어느 순간에 나도 모르는 평안과 기쁨이 찾아왔다. 이 시점에서 ‘이건 내가 예상하지 못한 기쁨이다’ 라는 생각을 하게 되어 ‘세렌디피티’란 주제를 정하게 됐다. 이 기쁨을 얻은 후에 작업에 속도가 붙으며 빠르게 작품을 마무리하게 됐다. 같은 맥락에서 인생에서도 인내와 고난의 시간이 필요하다. 이 시간을 잘 견디면 남과 다른 기쁨을 느끼게 되는 시점이 있다. 그래서 ‘난 기다려야 한다’라는 주의다. 기다리면 온다.”
Flowing-1806(1) 160x130cm mixed media on canvas 2018.(사진제공=전지연 작가)
-10년 이상 ’얼개‘를 소재로 작업을 하고 있다. ’얼개‘란 무엇인가

“얼개는 얼기설기 만들어진 구조물(structure)로 유기체이다. 이것은 원래 강원도 방언에서 유래한 말로 뼈대만 남아있는 구조물을 의미한다. 이 구조물이 부서지기 쉬운 것처럼 보이지만 때로는 단단한 형태의 강한 역할이 있기도 하다. 얼개의 이런 특성이 인간의 양면성과 너무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인간의 약한 부분과 강한 부분을 동시에 갖고 있는 것이 얼개의 형태라고 생각한다.”

“얼개는 항상 방향성을 갖고 움직인다. 이 방향은 제가 가야 할 비전이나 목표, 죽음 뒤에 가야 하는 본향을 의미하기도 한다. 얼개는 본향을 향해 가는 여정을 품고 있다.”

“얼개의 형태들을 보면 어떤 것은 빽빽하게 다양한 색들을 포함하고 있는가 하면, 어떤 것은 간단하게 라인만 있는 것들도 있다. 작품이란 것은 작가의 삶과 신앙과 철학이 그대로 표출되기 마련인데, 그런 의미에서 얼개의 형태들이 알록달록한 것은 창조주가 각 사람에게 준 달란트를 의미한다. 내가 가지고 있는 재능이나 재정, 환경을 조건 없이 흘려 보낼 때 서로 조건 없이 주고받아도 기뻐하는 그런 세상을 꿈꾸고 있다. 얼개들은 서로 상호작용을 하고 선순환을 할 수 있다. 그것이 얼개의 참뜻이다.”

-미술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궁금하다.

“결정적인 이유는 외할아버지의 영향이 컸다. 외할아버지께서 그림을 그리고 싶어 하셨지만, 그 시대는 ‘환쟁이(만화가)’라고 불리며 그림을 못 그리게 하던 때였다. 그래서 가정을 이루고 사업을 하다가 나중에 연세가 드셔서 그림을 시작하셨다. 원로작가 (故)김원 선생님께 사사 받으며 홍익화우회에서 활동하셨다.”

“할아버지께서는 내가 5살 때부터 야외스케치에 데리고 다니셨다. 할머니가 싸주신 도시락을 갖고 여의도 나루터 등 인근으로 나가서 할아버지는 유화를 그리셨고, 나는 내 그림을 그리기도 하고 흙장난이나 꽃을 따기도 했다. 물론 나는 낙서 수준이었다. 그래서 나는 어렸을 때부터 장래희망이 늘 화가였고, 본태 화가라고 생각했다.”

-초기 작가 시절의 작품과 최근 작품들을 비교할 때 가장 큰 변화는.

“작품에는 작가의 삶과 철학과 신앙이 투영되기 마련이다. 결혼하기 전까지는 허상, 허망, 윤회 등 불교적인 것들에 대한 작업을 많이 했다. 미국에 간 뒤 극적으로 하나님을 영접하고 1997년도에 기독교라는 신앙을 갖게 되면서 이전 작품과는 많이 바뀌게 됐다.”

“내가 바뀌니 그림도 바뀌었다. 처음에는 ‘관계성’에 대해서 많은 연구를 했다. 나와 가족과의 관계,나와 사회와의 관계 등 다양하게 얽혀져 있는데, 하나님과의 관계가 온전하니까 다른 관계들도 다 편해졌다. 나의 부족함을 인정하게 되니 다른 사람들도 사랑할 수 있게 됐다. 어느 순간 사람들이 너무도 귀하고 예뻐 보이는 순간이 왔다. ‘오늘은 기쁠까? 슬플까?’ 결국 나의 선택의 문제였다. 하나님이 기뻐하라고 하셨으니 기뻐하게 됐다. 이런 부분들을 계속 내 안에서 주장하게 됐고, 사람들의 아름다움을 보게 되니 나의 주변이 선하게 변화됨을 보게 됐다.”
-기억에 남는 개인전과 작품이 궁금하다.

“미술관 전시들은 기본적으로 큰 공간에서 할 수 있었기 때문에 어떤 스토리들을 보여줄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었던 것 같다. 성곡미술관, 쉐마 미술관, 서호 미술관 등에서 했던 전시들 모두 좋았다. 특히 2006년도 국립현대미술관 창작스튜디오에서 작업하던 때가 ‘얼개’의 형태가 나온 시점이어서 기억에 남는다. 기본적으로 늘 현재 진행하는 전시가 제일 좋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색면추상 화가로 유명하다. 색면추상화란 무엇인가.

“1940~1950년 사이에 나타난 추상표현주의 중에 하나다. 보통 마크 로스코나 바넷 뉴만 등이 주도한 운동이다. ‘절제’에서 나오는 작품들, 작가의 철학적인 이념을 바탕으로 단순하고 강렬한 색면회화를 추구한다. 관객들이 작품을 접했을 때 ‘이것이 뭐지?’ ‘이것으로 무엇을 얻을 수 있지’란 생각을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작품의 색을 보면서 작가가 무엇을 의도했는지 주파수를 맞춰 감상하는 것도 즐거운 일이 되리라 본다.”

“내 작품을 한 평론가가 색면추상 회화라고 말했다. 우선은 강렬한 색채와 단순한 이미지의 부분적요소도 있지만, 얼개 고유의 형태 이미지도 보여주고 있다. 얼개의 형태들이 계속 변화되어 해체되고 다시 또 확산이 된다. 거시적으로도, 미시적으로도 감상할 수 있다.”

-화가로서 가장 좋아하는 색은.

“작년까지는 노란색을 많이 썼다. 노란색은 화해의 색깔이고 치유의 색깔이다. 노란색을 많이 사용하면서 내 자신도 힐링을 받았고 내가 힐링 받으면서 완성한 그림들을 통해서 누군가는 또 다시 힐링을 느끼게 되는 것을 봤다.”

“올해는 인내하는 시간들을 지나서 ‘세렌디피티’처럼 또 다른 어떤 계기가 있을 것이라 본다. 그러다 보니 노란색에 국한되지 않아도 내가 편안하게 표현할 수 있는 색은 사방에 널려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번 전시의 작품을 보면 내가 힘 빼고, 잠잠해 할 때 표현되는 색들이 있다. 또한 ‘내가 그것을 해야 한다’는 목표의식을 갖고 에너지를 몰아붙일 때는 노란색, 파란색과 같은 강렬한 색을 만들게 된다. 가령 바다에서 둥둥 떠 갈 때 나오는 색이 있고, 파도를 넘어야겠다.’ 라는 생각을 할 때 나오는 색이 있는데 둘 다 내 삶인 것 같다.”
Flowing-1807(2) 72.5x72.5cm mixed media on canvas 2018.(사진제공=전지연 작가)
-다양한 재능을 갖고 있는 것으로 안다. 전작가에게 화가란 무엇인가.

“모든 사람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것, 또한 호기심에서 무언가를 시작하게 된다. 하지만 좋다고 해서 끝까지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을 한다. 사람이 환경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환경에도 맞아야 하고, 나의 비전과도 맞아야 한다. 또한 주위의 도움과 관계도 필요한 것 같다.”

“사람이 사회에서 살아가고 가정을 꾸리면서 생겨난 모든 관계들이 있는 상황에서 작업을 계속 끌고 가는 것이 쉽지는 않은 것 같다. 나의 경우 미술을 다섯 살 때부터 시작을 했지만, 포기하고 싶었던 경우도 많았다. 하지만 미술은 나와 내 자신이 소통하는 것 이였기 때문에 이것을 포기한다는 것은 사실 말이 안 되는 것이었다.”

“네 번의 큰 절망이 왔을 때, 그럴 때마다 이상하게도 선물 같은 일들이 생겼다. 이 선물은 하나님께로 온 것이며 하나의 달란트를 10달란트, 100달라트로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내게 주어진 달란트를 잘 가꾸고, 개발하고, 인내해서 풍성하게 만드는 것이 삶의 목적이 되는 것이다. 네 번의 절망의 순간들을 겪고 나니 이제는 소명이 됐다.”

-미술작가가 아닌 인간 전지연의 삶도 궁금하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는?

“올해가 52세다. 많은 연령대의 사람들을 보게 되는데 사랑하는 사람들이 떠나가는 것들을 볼 때 인간은 주어진 삶에 대해 거부하지 못하는 시한부의 상태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에게 맡겨진 삶을 어떻게 잘 살아가야 할지에 어떻게 마무리 할 지에 대한 묵상을 몇 년 전부터 계속하고 있다.”

“얼기설기 만들어 놓은 구조물인 얼개가 좋다. 비슷한 예로 어망을 계곡에 받쳐 놓으면 물고기만 잡히고 나머지는 다 빠지는 것을 볼 수 있다. 같은 의미에서 내가 어떤 것들을 얻기 위해서는 나머지는 다 버려야 되는 부분들이 있구나란 생각을 하게 된다. 얼개를 볼 때마다 다시 본질로 돌아 오게 되는 것이다. 2007년 처음 한 평론가로부터 ‘얼개’라는 단어를 받게 됐는데, 사실 나와 안 어울리는 단어라고 생각했다. 꾸준히 ‘얼개’로 작품을 해오고 있음에도 얼개 자체가 너무 투박하고, 단어 자체가 너무 촌스러운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 전시를 하면서 얼개를 생각해보니, 다시 기본으로 돌아와야 하고 내가 교만하지 않고 자만하지 않게 붙들어 주는 것이 ‘얼개’란 생각을 하게 된다. 얼개로 출발해서 10년, 20년을 갔다가 어느 지점에서 내가 목표했던 것이 끝나면 다시 시작하는 얼개는 ‘꿈이자 겸손의 마음’이다.”
-어떤 작가로 기억되고 싶나.

“여러 가지 모습들을 추구하고 있지만, 기본은 솔직하고 거짓이 없는 작가가 되고 싶다. 그림이라는 것은 작가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다. 내 작품이 좋으려면 전지연이라는 작가가 좋은 사람이어야 하는 전제 조건이 있기에 늘 마음의 모습을 바라보는 과정들이 필요하게 된다.”

“내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세상인 자격지심이나 계산 없이 그냥 주고 싶고, 그냥 받아도 기분 좋은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 나는 어떤 모습을 가져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을 한다. ‘겸손해지고 싶어요’란 말 자체도 교만하다고 할 만큼 사람의 욕심과 교만함은 계속 자라난다. 모든 사람들이 비워야 한다고 얘기한다. 그래야만이 새로운 것을 담을 수 있기 때문이다. 비우는 것은 사람마다 방법이 다르다고 보는데, 나는 개인전을 하고 나서 이 기간 동안 비우는 연습을 하고 있다. 어려운 일이긴 하지만 나를 계속 낮추고 비워내면서 아름답고 선한 사람, 작가 전지연으로 남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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