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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가만히 있어도 시장이 알아서 돈을 빌려줄 기업들에 중앙은행이 돈을 찍어 지원해준 셈이다. 이에 대해 한 투자자문사 포트폴리오 매니저는 “연준의 회사채 매입이 미국 경제에 어떤 공익을 제공하고 있는지 이해하기 어렵다”며 “연준이 나중에 포르셰(폭스바겐의 럭셔리 브랜드)를 임대하기 쉬워지나”라고 비꼬았다.
연준, 회사채 매입 목록 공개
30일(현지시간) 뉴욕 연방준비은행이 공개한 개별 회사채 목록을 보면 연준은 지난 16일부터 28일까지 86개 기업 회사채 4억2900만달러 어치를 사들였다. 이 중에는 AT&T와 코카콜라, MS, 나이키 등 미국 주요 기업들이 포함됐다. 버크셔해서웨이 에너지도 연준이 회사채를 매입한 기업의 명단에 올랐다. 워런 버핏 회장이 이끄는 투자회사 버크셔 헤서웨이가 지분의 90%를 보유한 기업이다.
연준은 또 향후 유통시장(Secondary Market·세컨더리 마켓)을 통해 채권을 매입할 794개의 회사 목록도 공개했는데, 앞으로 한 달 동안 가장 많이 구입할 회사채가 바로 일본 회사인 도요타 자동차인 것으로 나타났다. 2·3위는 독일 기업인 폭스바겐, 다임러였고, AT&T, 애플, 버라이즌이 그 뒤를 이었다.
이는 연준이 중앙은행이 특정 회사에 ‘주관적으로’ 혜택을 줬다는 비판을 피하기 위해 미국 회사채 유통시장에서 유통되는 모든 회사채들의 가중치를 반영한 이른바 ‘SMCCF 지수’를 만들어 회사채를 매입한 결과다. 미국 회사채 유통시장을 그대로 복제하다 보니 아이러니하게도 해외기업의 미국 현지법인들이 가장 큰 혜택을 보게 된 것이다. AT&T와 애플 등은 현금 유동성이 풍부한 회사들이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이들 6개 회사가 지수의 10%를 차지한다고 지적했다.
아론 클레인 브루킹스 연구소 규제·시장센터 정책 책임자는 워싱턴포스트(WP)에 “애플 보유자가 더 많은 도움을 필요로 하는가. 구글 회사채를 산 사람들이 코로나19로 치명적이고 예상치 못한 손실을 입을 가능성이 있는가”라고 반문했다.
추락천사 비율 3.62%에 머물러
연준이 ‘추락천사’(신용등급이 ‘투자등급’에서 ‘투기등급’으로 떨어진 회사) 회사채까지 매입한다고 밝혔을 때, 시장이 기대한 것은 코로나19로 경영에 타격을 받는 회사들의 자금난이 해소되는 것이었다. 이후 회사채 시장은 빠르게 안정됐다.
그러나 연준이 실제 구매한 회사채 중 투기등급(BBB 등급 이하) 채권은 3.62%에 불과하다. A~AAA 등급이 48.07%, BBB 등급이 48.31%를 차지한다. 당초 시장이 기대했던 것과는 괴리가 느껴지는 대목이다.
전문가들은 이같은 결과가 시장을 왜곡시키고 싶어하지 않는 연준의 딜레마를 고스란히 보여준다고 지적했다. 연준은 막대한 유동성이 개별 기업을 위해 사용될 경우 시장에 미칠 영향력과 이로 인한 비난을 우려하고 있다. 연준의 권한은 의회에서 위임받은 것으로, 어떤 회사채를 매입했는지 등은 차후 국회의 감사 대상이 된다. 고민 끝에 연준이 한 선택은 시장을 그대로 복사해 따라하겠다는 것이다.
브라운 어드바이저리의 탐 그라프는 CNBC에 “이는 말 그대로 우리가 하려고 했던 행동을 한다는 것이다. 이 사실을 시장이 인식하는 순간, 연준의 정책은 효력이 없어질 것”이라고 밝혔다.
골드만삭스는 연준의 이번 회사채 매입 카드가 강력한 것이었다고 평가하면서도 다음 경기 침체 때는 효력이 없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골드만삭스의 데이비드 최와 데이비드 메리클은 “연준이 이같은 도구를 일상적으로 사용한다면 시장은 앞으로 모든 경기 침체에서 연준의 신용 개입을 기대할 것”이라며 “이같은 우려 때문에 연준은 이를 위기 대응의 도구로 정착시키는 것에 대해 매우 부정적”이라고 분석했다.
한편 연준은 6월29일 공지를 통해 이날부터 5000억달러 규모의 ‘프라이머리 마켓 기업 신용 기구’ (PMCCF)를 가동한다고 밝혔다. 유통시장에서 연준이 회사채를 매입하는 세컨더리 마켓 기업신용기구(SMCCF)와 달리 PMCCF는 기업이 발행한 회사채를 직접 사들이는 것이다. 참여를 원하는 기업은 연준에 신청을 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