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현실적으로는 의료가 제공되는 방법이나 제도적인 측면에서 모든 국가가 동일하지는 않다. ‘의료 사회주의’적인 정책을 채택한 국가에서는 모든 사람에게 동등한 혜택을 주기 위해 국가에서 개입해 조절하고 통제한다. 의료 시설, 인건비, 의료인 양성 등 의료와 관련된 모든 비용을 국가가 부담한다.
국가는 국민이 납부한 세금에서 비용을 충당해 의료 시스템을 유지하고, 국민은 무료로 누구나 동일한 의료 서비스를 받는다. 대부분의 유럽국가와 호주·캐나다 같은 나라에서 채택하고 있다. 이들 나라에서는 국민 누구나 병이 들면 공정하게 순서대로 진료를 받는다. 의료가 국민 누구에게나 평등하게 제공돼야 한다는 명제에 충실한 시스템이기 때문이다. 응급상황이 아니라면 수술을 받아야 하는 병에 걸려도 몇 개월씩 기다려야 하는 경우도 있다. 이런 나라에서 의료는 공공재다.
하지만 최근 의료 사회주의 시스템을 채택하는 나라에서도 온전히 공적제도로서 운용되는 시스템의 문제점들이 나오고 있다. 그래서 약 10~15% 정도는 사적 의료 시스템을 허용하기 시작했다. 이와 달리 미국 같은 나라에서 시행하는 제도는 기본적으로 병원이나 보험회사가 주축이 된다. 의료 수가(진료비)나 의료 행위를 국가가 통제하지 않는다. 의료 행위를 통해 경제적 이익을 추구할 수 있다.
그렇다면 한국은 어떤가. 의사가 되기 위해 개인이 대학 등록금을 납부한다. 의사가 된 이후에도 전공의(인턴·레지던트) 수련 과정에 드는 비용을 병원이 부담한다. 의사가 되기까지 국가는 아무런 비용도 지불하지 않는다. 병원을 개업할 때도 빚을 내든 결국 자기 돈으로 시작해야 하고, 병원이 부도나면 개인 책임이지 국가는 일절 책임지지 않는다. 하지만 의료 행위에 부과되는 수가는 정부가 결정한다. 의료 행위가 이뤄지기 위해 필요한 시스템에는 전혀 투자하지 않는 정부가 의료 행위에 간섭하고 조정한다. 이는 유럽에서 채택하는 의료 사회주의도 아니고 미국식 의료 자본주의도 아니다.
대한민국에서 의료는 공공재가 아니다.
의사가 되기까지 드는 비용은 개인이 부담하고, 의사가 된 다음에는 공공재 역할을 강요하는 것은 불합리하다. 의료를 공공재로 만들고 정부가 의료 정책을 좌우하려면 적어도 의료인 양성 비용부터 국가가 책임져야 할 것이다. 1963년 의료보험법 제정 이후 우리 의료 정책은 저부담·저급여 기조가 크게 바뀌지 않았다. 이제는 진정 국민을 위한 근본적인 의료 개혁이 필요한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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