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데일리 트립in 임택 여행작가] 2014년 10월 21일 화요일 아침. 드디어 은수가 떠나는 날이 다가왔다. 이 날짜는 원래 우리가 예정한 날이 아니었다. 은수를 싣고 갈 배는 원래 25일에 떠나기로 되어 있었다. 따라서 우리는 23일에 임진각에서 멋진 출정식을 마친 후 24일 평택항으로 갈 계획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출항 날짜가 이틀이 당겨졌다는 소식을 받았다. 22일까지는 평택항의 수출 차량 대기 장소로 가져오라는 연락을 받은 것이다. 멋진 출정식은 취소되었고 은수는 이렇게 갑자기 먼 길에 올랐다. 이러한 상황은 이 여행에서 벌어진 ‘느닷없는 계획의 차질’의 시작에 불과했다.
이제 은수는 평택항에서 배를 타고 긴 항해를 떠나야 한다. 우리는 배가 최초의 여행지인 페루 리마에 도착할 즈음 비행기로 떠날 생각이었다. 해운회사의 말에 따르면 은수가 그곳에 도착하려면 50일 정도가 걸린다고 했다. 멀고 긴 항해였다. 나는 은수에 비해 국내에서 머물 여유가 있었다.
은수가 내게 온 후 떠나기까지 여러 가지 변화가 있었다. 그중에서도 은수의 제조사인 현대 자동차로부터의 정비 협찬 약속은 매우 흥분되는 일이었다.
여행을 떠나기 전 큰 고민은 여행 기간 동안 있을 은수의 정비 문제였다. 세계의 많은 곳을 여행하다 보면 크고 작은 고장이 일어날 것이다. 이러한 일에 대비하기 위해 나는 한 달간 정비학원에 다녔다. 짧은 기간의 정비 교육을 받은 후 내린 결론은 내가 직접 차를 고치는 일은 불가능하다는 사실뿐이었다. 고장의 원인을 알았다고 해도 고치는 일은 장비와 시설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나는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현대자동차에 정비 협찬 의뢰를 한 적이 있었다. 서류를 제출하자 회사 직원은 그의 책상에 수북이 쌓인 서류를 가리키며 말했다.
“선생님 이 서류가 오늘 하루에 온 제안서들입니다. 하하하”
이러한 담당자의 말에 별다른 기대도 하지 않았다. 몇 달이 지나도 연락이 없어 아예 잊고 있던 어느 날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안녕하세요? 임 택 작가님이시죠? 여기는 현대자동차입니다.”
“예 그렇습니다만 무슨 일로…….”
“네, 그렇습니다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지난번에 요청하신 협찬 건이 방금 승인이 났습니다.”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불확실한 미래 중 아주 큰 부분이 해결되었으니 그 기쁨은 말로 하기 어려웠다. 이제 현대라고 하는 큰 울타리가 생겼다.
“세계 어느 곳에서든지 차에 문제가 생기면 저희가 고쳐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야말로 여행의 성공 가능성을 한껏 끌어올리는 대사건이었다.
“아! 그리고 떠나시기 전에 저희 국내 정비팀에서 정비를 나갈 예정입니다. 차를 저희가 지정하는 정비소로 가져다주실 수 있을까요?”
늦은 결정에 보상이라도 하듯 전광석화와 같은 조치들이 이어졌다.
현대의 도움으로 속도를 제한하고 있었던 컴퓨터 프로그램도 수정했다. 이제부터 은수는 자신의 노력에 따라 얼마든지 속도를 낼 수 있는 존재가 되었다.
이러한 준비가 끝나고 이제 떠나야 할 시간이 온 것이다. 사실 나의 여행 계획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여행을 끝내고 어디로 입국하느냐 하는 문제였다. 세계를 한 바퀴 돌고 중국을 통해 들어온다고 했을 때 이 여행에 종착지는 중국 ‘단둥’으로 정했다. 단둥은 북한으로 들어가는 관문이다. 함께 떠날 사람들에게 마지막 브리핑에서 나는 여행의 종착지가 중국 단둥임을 명시했다, ‘이 여행은 중국 단둥에서 마치며 팀은 해산한다.’ 나는 여행 계획 중 아주 중요한 것을 팀원들에게 숨겼다. 그것은 북한 통과 계획이었다. 여행 초기에 북한 통과에 대해 논의를 하는 것은 시기적으로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단둥에 도착하여 팀을 해산한 다음 북한 통과를 팀원들에게 물어볼 생각이었다.
‘우리의 세계 일 주는 이곳 단둥에서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여러분 저는 북한을 통과해 남으로 내려갈 생각입니다. 혹시 함께하실 분이 있다면 신중히 결정해 주세요.’라고 말이다. 결국, 이 이야기는 미리 하지 않은 것이 옳았다. 함께 떠난 일행들은 하나둘씩 여행을 포기했기 때문이다.
내가 왜 북한을 통해 들어올 생각을 했을까. 나는 오래전부터 분단에 대한 고민이 있었다. ‘한국은 섬나라인가 대륙 국가인가?’ 하는 질문에 대한 고민이었다. 섬나라로 가는 수단은 두 가지다. 두 가지란 배와 비행기를 말한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의 현실은 어떠한가. 분단의 현실은 우리나라를 오랫동안 섬나라로 만들어 버렸다. 만일 마을버스를 통해 북한을 지나 돌아온다면 비로소 우리는 대륙국가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엄청난 일이다.
게다가 더욱 의미가 있는 것은 마을버스라는 상징성 때문이다. 마을버스는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는 존재다. 멋질 것도 없고 부러울 것도 없는 삶이 마을버스에 온전히 녹아있다. 마을버스의 인생이 우리 민초들의 삶과 아주 닮았다는 생각이다. 만일 마을버스가 세계를 돌아 북한 땅을 달려 돌아온다면 수많은 백성의 염원을 실현하는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생각이라면 출발점은 당연히 그 의미를 담는 곳이라야 했다. 나는 이 멋지고 의미 있는 여행의 출발지를 ‘임진각’으로 정했다. 당연한 일이다. 일 년 후 여행을 마치고 남북의 상황은 어떻게 변할지 모른다. 아직도 남북 간의 온기가 남아있는 시점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나의 기대와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남북은 멀어져 가고 있었다.
이러한 변화로 나는 엉뚱한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정부가 북한 방문을 허락하지 않는다면 불법으로라도 입북하겠다는 생각이었다. 버스를 화물기차에 실어 중국의 ‘나진선봉 자유무역지대’로 보낸 후 나는 육로로 들어간다는 생각이었다. 이것은 명백한 법이 허락하지 않는 불법이다. 이럴 경우 내가 받아야 할 법적 책임을 조사해 보았다. 당시 북한을 불법으로 입국하여 주석궁에서 북 찬양 글까지 남기고 온 사람이 있었다. ‘국가보안법’상 ‘적대국에 대한 찬양고무죄’가 성립된 경우였다. 대법원은 그에게 징역 8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판결했다. 내가 불법의 대가로 받아야 할 가장 가까운 사례였다. 그렇다면 나는 그보다 가벼운 형을 받을 가능성이 컸다. 나는 국가보안법을 위반하지 않을 테니까. 미로에 빠진 쥐가 드디어 담을 넘으려는 위험한 생각에 도달했다. 나는 이 생각을 여행이 끝나갈 무렵 함께 했던 일행에게 한 적이 있었다.
“형님! 형님 생각대로 북에 들어갔다고 합시다. 그런데 북한 조선 방송에서 이렇게 방송하는 거예요. ‘남한 체제에 염증을 느낀 세계적인 여행가 임택 일행께서 먼 길을 돌고 돌아 조국의 품에 안기시었습니다.’ 이러면 형님은 그냥 북에서 살아야 하는 거예요. 하하하” 우리는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며 한껏 웃었다.
은수를 보내는 날. 임진각의 아침은 남북의 현실처럼 싸늘하고 적막했다. 자욱한 안개는 우리들의 앞날에 있을 험난한 여정을 예고하는 듯했다. 함께 여행하기로 한두 명의 일행이 함께했다. 안개는 사람의 시야를 가려 앞을 예측하기 힘들 때도 있지만 두려움을 가려주는 이점도 있다. 은수가 떠남으로써 우리의 여행은 시작되었다. 은수가 떠 난 후 우리의 앞에는 강력한 허리케인이 다가오고 있었다. 이 강력함은 여행 내내 나를 괴롭혔다. 일행과의 갈등이 바로 그것이었다. 우리는 지금까지 여행을 충분히 토론했고 이해했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착각이었다. 우리는 모두 각자만의 집을 견고하게 짓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