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북한이 29일자 노동당 기관지 노동신문을 통해 공개한 신형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화성-15형’ 시험발사 모습. (사진=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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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일리 김성곤 기자] 문재인 대통령의 ‘한반도 운전자론’이 또다시 시험대에 올랐다. 북한이 지난 9월 중순 이후 75일 만에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화성 15형’ 발사 도발을 감행했기 때문이다. 과거와는 차원이 다른 도발이다. 고각이 아닌 정상 각도로 발사할 경우 미국 동부를 포함해 본토 전역을 타결할 수 있는 ICBM으로 성능이 개선됐다는 평가가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북한이 이번 도발을 시험발사로 규정한 만큼 추가 도발에 나설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미국은 북한의 도발에 군사옵션을 거론하며 강력 반발하고 있다. 북미관계가 일촉즉발의 군사적 위기상황으로 치달았던 지난 8월 말폭탄 대치국면으로 회귀한 것이다. 북핵문제의 평화·외교적 해법을 강조해온 문 대통령으로서는 운신의 폭이 좁아졌다. 자칫하면 이른바 ‘코리아 패싱(한반도 문제에서 대한민국 소외 현상)’ 논란이 또다시 재현될 수 있다.
불안정한 평화국면 이후 ‘본토타격’ vs ‘완전파괴’ 북미 강대강 대치 지난 9월 중순 이후 북한은 잠잠했다. 두 달 보름간 불안정한 평화국면이 이어졌다. 다만 북미 양국은 생산적인 결과물을 만들지 못했다. 상대방에게 일방적인 백기를 요구하는 전략을 고집했기 때문. 한때 중국이 제시한 쌍중단(雙中斷·북한의 핵미사일 도발과 한미 연합군사훈련의 동시 중단)의 실현 가능성이 점쳐지기도 했지만 모두 물거품이 돼버렸다. 북한은 미국에 타격능력을 과시하고 내부체제 결속을 도모하기 위해 국제사회의 경고에도 도발을 감행했다. 심각한 것은 문 대통령이 과거 언급했던 ‘레드라인(red line,금지선)’을 사실상 넘어섰다는 것. 문 대통령은 지난 8월 취임 100일 기자회견에서 “북한이 레드라인 임계치에 점점 다가가고 있다. 북한이 ICBM(대륙간탄도미사일)을 완성하고 거기에 핵탄두를 탑재해 무기화하는 게 레드라인”이라고 밝힌 바 있다.
북한은 사실상 미국 동부까지 타격이 가능한 ICBM개발을 눈앞에 둔 상황이다. 핵무기 경량화·소형화까지 이뤄지면 미국 전역이 북한의 핵공격 위협에 노출되는 셈이다. 북한의 의도는 핵포기 없이 북미대화를 통해 체제안전을 보장받겠다는 것이다. 미국은 강력 반발하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김정은 북한 노동당위원장을 정신병자를 뜻하는 ‘병든 강아지’(a sick puppy)로 부르며 조롱했다. 특히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에게는 대북 원유공급 중단도 요청했다. 니키 헤일리 유엔 주재 미국 대사는 29일(현지시간) 미국 뉴욕 유엔본부에서 열린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긴급회의에서 “만일 전쟁이 난다면, 북한 정권은 완전히 파괴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北 레드라인 넘나든 도발에 文 난감…평창올림픽 활용 구상도 먹구름
북미 대치가 가팔라지면서 문 대통령은 난감한 처지에 내몰렸다. 대한민국이 운전석에 앉아서 미중일러 등 한반도 주변 4강과의 조율을 통해 남북문제를 주도한다는 이른바 ‘한반도 운전자론’은 폐기 직전의 수순이다. 통미봉남 전략에 따른 북한의 철저한 외면 때문이다. 북한은 우리 정부를 대화상대로조차 인정하지 않고 있다. 문 대통령이 공을 들였던 ‘베를린구상’을 걷어찬 게 대표적이다. 북한은 내년초 핵탄두를 탑재한 ICBM를 실전 배치해 핵보유국 지위를 얻은 뒤 북미협상에 나설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또 북핵문제 해결에 중국의 영향력을 기대할 수 있지만 효과는 미지수다. 문 대통령은 29일 아베 신조 일본 총리와의 통화에서 “다음 달로 예정된 중국방문을 통해 시진핑 주석에게 더욱 강력한 역할을 해달라고 요청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북중 관계는 장성택 처형 이후 예전만 못하고 중국의 영향력도 약화됐다. 더구나 순망치한(脣亡齒寒)이라는 관계를 고려할 때 북중 접경지역의 불안을 감수하면서 중국이 대북 원유공급 중단을 실행할 지 의문시된다.
문 대통령으로서는 첩첩산중이다. 국면을 전환시킬 묘수가 전혀 보이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가능성은 희박하지만 현 상황에서 최대 변수는 평창 동계올림픽이다. 올림픽은 단순한 스포츠 교류가 아니라 세계 정상들이 대거 참여하는 글로벌 외교무대다. 만일 북한의 올림픽 참여가 확정된다면 북핵문제를 대화국면으로 전환시킬 수 있는 실마리가 된다. 문 대통령이 취임 이후 정상외교에서 각국 정상들의 평창 동계올림픽 방문을 호소한 것도 이때문이었다. 다만 북한의 이번 도발로 평창 동계올림픽에도 먹구름이 드리워졌다. 당장 올림픽 안전 개최는 물론 성공 여부에 대한 우려도 커지고 있다. 평창 동계올림픽을 북핵문제의 히든 카드로 고려했던 문 대통령으로서는 고민이 깊어질 수밖에 없는 대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