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일 도산서원 원장, 도산서원선비문화수련원 이사장] 지난 달 20일(음력 12월 8일)에 거행된 퇴계 이황(1501~1570) 선생 불천위 제사는 예년과 사뭇 달랐다. 코로나19 탓에 참가자는 마스크를 썼고, 현장에 오지 못한 사람은 화상으로 참여하는 진풍경이 펼쳐진 것이다. 4대까지 지내는 일반 제사와 달리, 퇴계처럼 나라에 큰 공이 있거나 덕망과 학식이 아주 높은 분은 세월이 아무리 지나더라도 사당에서 신주를 옮기지 않는 불천위(不遷位)로 모시고 해마다 제사를 지낸다. 성격이 이렇다보니 퇴계 선생 불천위 제사 때면 후손은 물론이고 다른 문중과 유림, 연구자, 도산서원과 선비문화수련원 관계자 등 수백 명의 제관들과 이를 알리려는 취재진까지 모여들어 종택의 제사 공간인 ‘추월한수정’ 마당까지 가득 들어차곤 했다.
올해는 특히 선생이 세상을 떠난 지 450주년 되는 해이기 때문에 제사 참여 희망자는 어느 때보다 많았다. 하지만 강화된 사회적 거리두기 시책으로 이를 모두 수렴하는 데는 애로가 있었다. 그러던 차에 퇴계의 학문을 연구하고 생활 속에 실천하는 것을 목적으로 구성된 ‘도산서원 참공부 모임’의 멤버이자 한문학계 중진인 허권수 명예교수(69세, 경상대)가 줌(ZOOM) 방식의 ‘화상 제사’ 아이디어를 제안하여 초유의 비대면 불천위 제사를 치르기에 이르렀다.
화상 제사가 처음이고 연세 드신 분에게는 익숙지 않은 방식임에도 서울, 대구, 진주, 안동 등 전국 각지에서 30여 분이 참여했다. 이들은 컴퓨터 화면에 나타난 불천위 신주와 제물을 차린 제사상을 앞에 두고 처음부터 끝날 때까지 현장의 제관들과 똑같이 행동했다. 처음이라 생소하고 현장감도 떨어질 수 있었으나, 점점 비대면 사회로 접어드는 시점에서 존경하는 어른의 제사에 참여하는 것 자체가 잊지 못할 기회였다는 반응이 중론이었다. 때가 때인 만큼 450년 만에 처음으로 참여자들에게 음복도 식사도 제공되지 않았다. 종가 입장에서는 참으로 미안한 일이었으리라. 하지만 몹쓸 바이러스로부터 ‘부모가 물러준 소중한 생명을 잘 보전하는 것이 효도의 첫 걸음이라’며 서로 웃으며 종택을 나섰다.
시대의 변화에 따른 이 같은 혁신은 퇴계 선생의 삶과도 맥락을 같이 한다. 제자들이 기록한 <퇴계선생언행록>에서는 “선생은 장남이 아니었기에 관직 생활 등으로 제사에 참여하지 못할 때면 날을 기다려서 축문과 밥, 국은 생략하고 지방을 갖추고 떡과 면만 차려 제사를 지냈다”고 전한다. 이를테면 큰집에 모셔진 신주와 비대면 상태로 제사를 지낸 것이다. 또 자신의 상례에 대한 유언에서는 ‘의어금이불원어고(宜於今而不遠於古)’ 즉, ‘지금의 세상에도 마땅하고 옛날과도 크게 동떨어지지 않도록 하라’고 일렀다. 옛 제도에 크게 벗어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살아있는 사람의 사정과 형편을 살피라는 가르침이다.
퇴계종가는 이러한 선생의 가르침에 따라 시대 변화에 꾸준히 부응하여 왔다. 새벽 1시경에 지내던 제사를 2014년부터 초저녁 제사로 바꾸어 참여자들의 부담을 덜어주고 있다. 값비싼 유밀과(油蜜果)를 차리지 말라는 선생의 유언에 따른 그간의 조촐한 제수도 더 간소화하고 있다. 또 지난해 가을에는 도산서원에 유교국가 조선 개국 이후 처음으로 여성이 첫 잔을 올리는 ‘여성 초헌관(初獻官) 시대’를 열기도 했다.
이러한 변화는 타 종가와 유림에도 점차 확산되고 있다. 조상의 제사를 받드는 봉제사(奉祭祀)는 종가의 가장 중요한 책무인 까닭에 급격한 수용이 현실적으로 쉽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제사’라는 고유의 전통 문화 틀에서 멀리 벗어나지 않고(不遠於古) 시대에 부응해야 한다(宜於今)는 생각이다. 그렇게 하여 바쁜 도시생활로 오고 싶어도 오지 못하는 자손에게 비대면으로라도 조상을 만나 절을 할 기회를 주고, 또 오려고 하지 않는 자손도 온라인으로나마 찾게 한다면 의미가 있을 것이다.
이것은 일반가정도 마찬가지다. 아무쪼록 이러한 변화가 더욱 확산되어 제사의 정신은 지켜나가되, 절차나 방식에는 변화를 주어 조상과 후손의 만남이 오래 이어지길 염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