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데일리 트립 in 정기영 기자] 봄날, 열흘이 넘는 지리산 둘레길 백패킹은 백수가 되고난 후 뭐 하나 제대로 한 게 없어서 마음먹고 다녀온 길이었다. 백패킹으로 다니지만 비가 내린다는 예보가 있거나 피곤하면 텐트를 펼치지 않았다. 물먹은 텐트는 무거운데다 혹여 꼭꼭 싸매도 장비에 물기가 스며들었다. 지리산 둘레길의 일정이 거의 끝나갈 무렵 쌍계사 근처의 게스트 하우스에서 하루를 머물렀다.
먹을 음식 몇 가지를 사러 근처 편의점에 다녀오면서 길가 옆 쌍계사 차 시배지 안내판과 함께 ‘천년차밭길’이라는 이정표가 눈에 띄었다. 화개지역이 우리나라 차 문화가 시작된 곳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차밭길이 있다는 것은 몰랐다. 혼자 걷는 걸음, 어디를 걷는다고 해도 누가 뭐라고 할 사람도 없으니 천년차밭길로 일정을 바꾼다. 숙소로 돌아와 천년차밭길에 대한 것을 검색해 보니 마음에 드는 정보가 없었다. 이쯤 되면 검색은 포기요, 몸이 고생이어도 가는 게 능사다.
아침이 되어 쌍계사 앞 식당에서 밥을 먹고 어제 보아 두었던 차 시배지로 향했다. 정자로 오르는 길목에 천년차밭길이라는 이정표와 함께 다원예술순례 알림판이 같이 보였다. 옳거니. 차밭길을 안내하는 이정표가 없어도 다원예술순례의 시그널을 보면서 따라가면 되겠다는 감이 들었다. 걷다가 안 되겠다 싶으면 마을로 내려가면 그만이니까.
봄날의 아침 차밭을 감도는 기운은 살짝 서늘했지만 코끝이 시원한 물기가 느껴졌다. 찻잎을 따는 즈음에는 섬진강이 주는 습한 기운에 일교차가 커 이곳 화개와 하동지역의 차가 최고의 맛을 내는 것도 이 물기 때문이리라. 찻잎 날개를 단 찻잎새가 가는 방향대로 걸으니 바람이 스며드는 시누대 숲에 들었다. 무언가 자랄 수도 없을 정도로 촘촘한 대숲에는 씨가 날려 자란 차나무와 대나무가 뒤엉켜 자라고 있어 길이라기보다 흔적에 가까웠다. 흔적은 농로로 이어졌고, 농로는 다시 차밭과 만났다.
차밭을 따라 걷는 건 처음이어서인지 은근 재미있다. 풍경 좋은 곳에는 쉬어갈 만한 의자가 놓여 있어 화개골 깊은 곳까지 시선을 두면 그 끝은 지리산 능선이었다. 열흘이 넘는 시간을 내처 지리산 자락을 걸었으면서도 지리산의 풍경을 만나면 푸근하다. 꿈틀대듯 꼬불거리는 차밭 농로는 이미 많이 올라간 기온에 달궈져 제법 열기가 올라왔지만 찻잎이 주는 녹색의 싱그러움으로 눈은 시원했다. 화개의 차밭길에서는 차밭 안에 무덤이 있는 생소한 풍경을 만난다. 어느 차밭이고 무덤 한 두기가 없는 차밭이 없을 정도로 차밭을 기반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생활 터전인 곳.
가까이는 화개천을 내려다보고, 멀리는 섬진강을 바라보며 걷는 천년차밭길은 야생성이 짙다. 보성의 차밭이 양반댁 안방마님의 가지런하게 정돈된 가르마 같다면 화개의 차밭은 잔머리카락이 마구 빠져나오는 대로 대충 빚은 몸종의 머릿결 같다. 산비탈의 밭은 면적이 좁아 차나무가 쭉 길게 연결되지 않아 막손인 내 솜씨로는 멋들어진 사진 한 장 찍기에도 역부족인 곳이다. 하지만 이곳의 차밭은 하늘과 맞닿아 있다. 차밭을 따라 걸으면 어느새 마을 뒷산 제일 높은 곳까지 올라섰다가 다시 내려가기를 여러 번. 걷다가 뒤돌아보면 차나무의 곡선이 구름과 하늘을 만난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이 풍경이 좋다.
길가에는 차나무만큼 가내수공업 형태의 다원도 많다. 그중에는 차를 마실 수 있는 곳도 있고, 차만 만드는 곳도 있었다. 천년 차나무라 불리는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차나무와 유전 형질이 유사한 15개체가 산재되어 후계목으로 인정되고 보전된 도심차밭으로 가는 길은 무척 가팔라 숨이 턱턱 막히지만 앞으로 걷다가 뒤로 걷다가를 반복하며 올랐다. 아래에서부터 올려다본 차밭은 경사면이 상당한 산비탈로 ‘저곳에서 어떻게 차를 따나’ 싶었건만 그 차밭 사이로 들어서니 한 쪽 다리에 힘을 빡 주고 서 있는 나를 발견했다. 굴러 떨어지기는 싫은 게지.
천년차밭길은 지리산 둘레길과 만나며 일부 구간이 지리산 둘레길과 겹친다. 어차피 지리산 둘레길을 걷는 중이었으니 상황 봐가며 걷는 구간을 결정하는 날탱이 둘레커에게는 이 길이 내심 반가웠다. 거리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시작부터 목적했던 곳까지 걸음마다 쉬고, 보고, 사진 찍고를 반복했더니 생각보다 시간이 오래 걸렸다. 배낭을 내려놓고 남은 구간을 걷기 위해 다시 차밭길로 내려와 정금마을의 어귀까지 내려왔다. 내친김에 지리산 둘레길을 더 걸을까 싶기도 했지만 배낭을 내려놓고 온 것이 마음에 걸려 목적지로 되돌아 걸었다.
2년 전 봄에 왔을 때는 없던 정자가 생겨 차밭이 한 눈에 보이는 이곳에서 하루를 머물 생각이었다. 텐트를 치기 위해 해가 내려가기를 기다리는데 불어오는 바람이 심상치 않다. 살짝 불던 바람이 어느 결인가 너무 세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팩을 박으면 괜찮겠다 싶어 텐트를 꺼내어 폴대를 끼우는데 아뿔싸!! 바람이 얼마나 거센지 텐트를 잡은 내 손은 점점 힘이 들어갔고, 바람에 갈피 못 잡고 흔들리는 텐트는 금방이라도 녹차밭 어느 곳으로 날아가거나 바람에 찢어질 것만 같았다. 텐트를 잡고 바람을 지탱하는 몸이 휘청대며 중심을 잡기도 힘들었다.
이럴 때는 포기가 답이다. 햇살이 좋고, 화개 녹차밭의 풍경은 좋았지만 바람은 감당이 되지 않았다.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으니 실망이 커야 하지만 지금 내 상황은 배낭에서 빼놨던 물건들이 날아갈 새라 한 손은 배낭을 잡고, 한쪽 다리로는 물건들을 누르며 다시 배낭 패킹을 시작했다. 그 와중에 물을 담은 1리터짜리 물통이 바람에 바닥으로 굴러 떨어지는 것을 보며 포기하기를 잘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귀가 아플 정도로 윙윙대는 바람을 뒤로 하고 낮동안 내내 왔던 길을 다시 돌아 내려가며 오늘 머무를 곳의 목적지를 바꿨다. 이전에도 다녀온 하늘호수차밭 카페에 연락을 드려 사장님과 통화 후 그 곳 사유지에서 머물기로 하였다. 아는 분이 계시다는 건 이럴 때 좋다. 차밭을 지나왔지만 하늘호수차밭으로 올라가는 길에서는 여전히 차밭 풍경이 이어졌다. 차밭에서 먹으려고 포장해온 감자전, 사장님께서 가져오신 막걸리로 거의 2년만의 회포를 풀었다.
발그스름하게 물드는 해넘이가 주는 따뜻한 기운 아래 텐트를 치고 나니 차밭 한가운데서 자는 거나 차밭 언저리에서 자는 거나 매한가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목적지가 바뀌어도 천년 차밭향은 여전했다. 내일은 다시 차밭길을 걸어 화개장터에 다녀와야겠다. 화개 차밭골에서 찻잎새가 알려주던 구절이 떠올랐다. 찻잎새가 보는 쪽으로 사뿐사뿐 걸어요. 찻잎새가 보는 쪽으로 녹색을 즐기며 걸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