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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대 경제학과대 4년 장학금을 받고 입학한 성 원장은 생활비를 아끼기 위해 고시반에 들어갔다. 공부도 생계를 위해 시작했다는 그지만 1989년 제33회 행시에 당당히 수석합격했다. 발령을 받기전까지 대구에서 유명 학원 강사로 이름을 떨치기도 했다. 그가 쓴 경제학책은 공무원시험 준비생들사이에서 꽤 팔려나가기도 했다.
성 원장은 “요즘은 개천에서 용나는 시스템이 아니다보니 어렵게 자라 잘되는 것에 대한 신화가 무너져 흙수저, 금수저, 다이아몬드수저라는 말까지 나온다”며 “요즘 젊은이들은 힘들 것”이라고 말했다.
행시 합격할 때만 해도 재정경제원 세제실이나 예산실에서 일하는 것이 꿈이었다. 자기처럼 가난한 사람을 위해 세금제도를 기획하고 예산을 집행하고 싶었지만 성 원장은 기대와 달리 ‘보험’만 세 번이나 돌았다. 재경원 시절 보험제도담당관실에서 사무관으로 일했고 1990년대 말 미국으로 유학가기 전엔 재정경제부 금융정책국 보험과에 몸담았다. 주(駐)프랑스 한국 대사관 재경관을 마치고 돌아와서는 금융위원회 보험과장을 맡았다.
성 원장은 “2008년 보험과장을 맡으면서 이게 운명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면서 더 열심히 일하게 됐다”며 “책을 읽지 않으니 바보가 돼가는 것 같아 그 해 100권을 읽는 것을 목표로 독서도 시작했다”고 말했다. 인생을 받아들인 이후 더욱 풍요로워졌다는 뜻처럼 들렸다.
보험개발원장 취임 이후 일반보험 요율산출 확대, 빅데이터 사업 강화 등 민간보험사들로부터 소외받을 수밖에 없는 영역의 공적 역할에 주력하며 활발히 사업을 전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