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란법 통과…'청렴 괴물' 태어나다

공직자 부정청탁·금품수수 차단 위해 탄생
입법 과정서 몸집 불리면서 변형·왜곡돼
위헌시비·수정법안 넘어야 제구실 가능
  • 등록 2015-03-03 오후 7:49:08

    수정 2015-03-03 오후 7:49:08

[이데일리 김정민 기자] 내 이름은 ‘부정 청탁 및 금품 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이다. 어머니인 김영란 전 국민권익위원장 이름을 따서 ‘김영란법’으로도 불린다. 태어난 곳은 서울시 영등포구 의사당대로 1번지. 대한민국 국회다. 내가 공식적으로 세상에 태어난 날짜는 2015년 3월 3일이다.

이날 국회는 본회의를 열고 나를 세상에 내보냈다. 앞으로 공직자와 국립 및 사립학교 교직원, 언론인은 직무 연관성 여부와 관계없이 100만원을 초과한 금품을 수수할 경우 형사처벌을 받게 된다. 인허가·면허·승진 등과 관련 부정 청탁을 하거나 공직자가 청탁을 이행해도 처벌받는다.

2012년 국민권익위원장으로 재직 중이던 어머니는 벤츠 여검사, 그랜저 검사 등 금품 수수로 국민의 공분을 샀던 공직자들이 대가성이 없었다는 이유로 처벌을 피하는 현실을 개탄해 나를 탄생시킬 결심을 했다.

2013년부터 논의가 본격화됐지만 정부 부처간 조율 과정에서 이해 당사자인 공무원들의 칼질에 누더기가 됐다. 당시 정홍원 국무총리가 나서 중재안을 내놓은 덕에 7월 가까스로 국무회의를 통과해 국회로 넘겨졌지만 국회의원들 또한 나를 외면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국회 정무위원회에 계류된 채 식물인간으로 전락해 있던 내가 다시 기지개를 켠 계기는 지난해 4월 발생한 세월호 참사다. 박근혜 대통령은 사고 이후 대국민 담화를 통해 ‘관피아’(관료+마피아) 척결 방안의 하나로 나를 언급하며 국회의 조속한 통과를 당부했다. 정무위 의원들은 국회 제출 9개월만에 심사에 착수했지만 연말 정기국회 처리에는 실패했다.

올해 1월 정무위는 심의 과정에서 유치원을 포함한 사립학교 교직원에 이어 기자들까지 적용 대상을 확대했다. 사립학교 교직원이 포함된 것은 국공립 교직원은 적용하면서 사립은 제외하는 것은 형평성에 문제가 있다는 이유에서다.

공영방송인 KBS와 EBS 종사자들이 규제 대상에 포함된 만큼 같은 방송사인 MBC와 SBS 종사자들에게도 적용해야 한다는 논리가 등장했고, 결국 전 언론사로 규제 대상이 확대됐다. ‘본인 대신 가족에게 돈을 주는 방식으로 규제를 피해 갈 수 있다’는 지적에 적용 대상이 친인척으로 넓혀졌다.

덩치를 불리면서 나는 괴물이 돼 갔다. 공직자 등 직접 대상자만 186만명. 친인척까지 포함하면 1500만명이 적용 대상이 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자 전 국민을 잠재적 범법자 취급하는 거냐는 여론이 들끓었다. 여야는 최종 합의에서 배우자 외에 친인척을 적용 대상에서 제외, 내가 관리해야 하는 인원이 300여만명 수준으로 줄었지만 솔직히 감당할 자신은 없다.

반면 공직자가 자신 또는 가족, 친족과 이해관계가 있는 직무를 수행하지 못하도록 한 ‘이해 충돌 방지’ 조항이 삭제되면서 나는 절름발이가 됐다. 게다가 나를 악용해 ‘정적’을 제하는 수단으로 활용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또 나를 근거로 검찰이나 경찰이 공직사회와 언론을 좌지우지하는 ‘검·경 공화국’이 될 수 있다고 걱정을 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국회 본회의를 통과하면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기는 했지만 나는 아직 잠들어 있다. 내가 활동할 수 있는 시점을 국회가 내년 9월로 미뤄놨기 때문이다. 내가 잠에서 깨어나 울음을 터트릴 수 있을 지는 아직 미지수다.

법조계에서는 내가 위헌 시비를 피해 가기 어려울 것으로 보고 있다. 적용 대상에서 제외된 의사·변호사 등 공공영역에서 활동하는 다른 직업군들과 형평성에 문제가 있다는 이유에서다. 국회의원들이 여론에 밀려 나를 세상에 내보내기는 했지만 내년 4월 총선이 끝나면 내 몸에 다시 칼을 댈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나는 아직 ‘미생’(未生)이다.

(취재를 바탕으로 1인칭 스토리텔링 방식으로 재구성한 기사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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