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정치연구회 회장을 역임한 서정건 경희대 교수는 10일(현지시간) 펜실베이니아주 필라델피아 국립헌법센터에서 열린 해리스 부통령과 트럼프 전 대통령의 첫 TV토론에 대해 이같이 평가했다. 트럼프 전 대통령은 바이든 대통령과 토론회에서 시종일관 차분하게 발언하며 지지율을 끌어올렸던 것과 달리 이날 토론회에서는 해리스 부통령이 놓은 ‘미끼’를 덥석 물고 흥분하며 평정심을 잃은 모습을 수차례 보여줬다. 지난 2020년 바이든 대통령과 대선토론에서 그의 말이 끝나기 전에 개입하고 정돈되지 못한 말을 쏟아내면서 표심을 잃었던 모습을 다시 유권자들에게 상기시킨 것이다.
대표적인 사례가 이민과 경제이슈다. 트럼프 전 대통령은 그간 바이든 행정부 때 이민자가 늘면서 범죄가 늘고, 인플레이션으로 서민들이 고통을 받았다고 공격해 왔다. 이번 토론에서도 이를 부각하며 해리스 부통령을 공격했어야 했지만, 오히려 그는 해리스 부통령의 ‘미끼’에 물고 대응하는 데 대부분 시간을 할애했다.
해리스 부통령은 이민문제가 나오자 트럼프 전 대통령이 초당적 국경 법안을 무산시켰다고 공격하면서 화제를 돌렸다. 그는 능글맞은 표정으로 “트럼프 전 대통령의 유세장에서 사람들이 지루해 하며 떠난다”고 트럼프 전 대통령을 도발했다. 이에 트럼프 전 대통령은 불쾌한 표정으로 “사람들이 오는 이유는 내가 하는 말을 좋아하기 때문”이라고 말한 후 “아이티 이민자들은 개와 고양이 등 반려동물을 잡아먹고 있다. 이것이 우리나라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이며 부끄러운 일이다”고 실언을 했다.
시종일관 중립을 지켰던 진행자마저도 곧바로 팩트체크(사실확인)에 나섰다. ABC뉴스 앵커 데이비드 뮤어는 즉시 “(아이티 이민자가 많은) 오하이오주 스프링필드의 시 관리자가 이민자 커뮤니티에서 반려동물이 다치거나 학대받았다는 믿을 만한 보고가 없었다고 말했다”고 지적했고, 트럼프 전 대통령은 “내 개가 잡혀서 식용으로 사용됐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TV에서 본 적이 있다”고 답했다. 그러자 해리스 부통령은 “극단적인 이야기를 하네요”라고 웃어넘겼고, 이는 해리스 부통령이 트럼프 전 대통령에 승기를 잡는 결정적인 장면이 됐다.
경제문제도 해리스 부통령에 불리한 이슈였다. 바이든 행정부 때 인플레이션이 고조됐고, 고금리 장기화에 미 시민들의 불만이 고조돼 있기 때문이다. 기업인 출신 트럼프 전 대통령 입장에서는 해리스 부통령의 경제정책을 적극 공략하면서 격전지 중도층을 사로잡는 게 우선 과제였지만, 이 역시 실패했다.
패턴은 같았다. 해리스 부통령은 첫 발언에서 트럼프 1기 행정부 때 △대공황 이후 최악의 실업률 △세기의 최악 공중 보건 전염병 △남북전쟁 이후 우리 민주주의에 대한 최악의 공격을 경험했다고 선제공격에 나섰다. 이어 트럼프 전 대통령의 보편적 관세 부과 정책을 ‘트럼프 판매세’라고 정의하며 “중소기업과 중산층의 생활을 저하하고 부자들의 세금을 깎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과거 공격을 주도했던 트럼프 전 대통령은 수세적으로 방어에 나설 수밖에 없었다. 그는 “판매세 부과 계획은 없다. 대신 타국에 관세를 부과할 것이다. 다른 국가들이 마침내 미국이 75년간 세계에 제공했던 것을 갚기 시작했다”고 했다. 경제학자들은 트럼프 관세가 인플레이션을 악화시킨다고 비판하고 있는데, 이에 대한 해명을 적극적으로 하지 못한 채 해리스 전 대통령의 ‘미끼’에 반박하는 데 시간을 대부분 썼다.
이날 해리스 부통령이 미래를 얘기했다면, 트럼프 전 대통령은 과거에 얽매여 기존 주장을 반복했다는 평가도 적지 않다. 특히 해리스가 ‘검사 vs 범죄자’ 구도를 강화하고 ‘과거로 회귀하지 말자’고 강조하며 새로운 지도자 면모를 보여줬다면 트럼프 전 대통령은 여전히 구태의연한 이미지를 고착화했다는 지적이다.
서 교수는 “이번 토론회는 해리스가 여전히 준비 안 된 후보가 아니냐 급조된 후보가 아니냐는 염려가 있었고 이를 확인하자는 게 핵심이었다”면서 “오히려 트럼프는 낚였고, 할 말은 제대로 못 하고 ‘막말’하는 트럼프가 다시 상기되면서 해리스에 좀 더 유리한 구도가 됐다”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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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서 교수는 이번 TV토론에 따른 지지율 변화는 많아야 1~2%포인트에 그칠 것으로 봤다. 미국의 정치가 양극화한 상황에서 TV토론에 따라 유권자의 표심이 움직이는 비중이 상당히 줄었다는 평가다. 그는 “결국 대선 판세는 끝까지 50대 50으로 갈 것이고 누가 더 투표장으로 자기 지지자들을 많이 끌어올 수 있느냐는 문제가 중요하다”며 “해리스가 대통령 후보가 되면서 젊은 유권자들이 투표에 관심을 더 두게 됐기 때문에 올 상반기보다는 민주당 지지율이 예상보다 더 높게 나올 수 있다”고 예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