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고·공시 누락해도 구속될 수 있는 한국…경영 발목 잡는 공정거래법

[글로벌 스탠더드에서 답을 찾다] 공정경쟁정책 ②
담합·시지남용·불공정행위 모두 형벌…OECD국 중 유일
신고·공시 등 질서위반행위까지 형사처벌 조항 `빼곡`
`형벌 최소화` 전속고발 무력화하는 의무고발요청제
"담합, 부당지원, 시정조치 불이행만 형벌조항 있어야"
  • 등록 2022-05-09 오후 7:21:01

    수정 2022-05-10 오전 9:54:19

[세종=이데일리 조용석 공지유 기자] “몇 년 전 한 대기업 회장이 자신이 요새 하는 일은 직원들이 사업을 추진하겠다고 기안을 가져오면 제발 하지 말라고 만류하는 것이라고 하더라구요. 왜 그러냐고 물으니 `기업 활동 중 발생한 일로 형사처벌 위기를 몇 번 넘기니 새로운 사업을 벌이는 것이 무섭다`고 답하더군요. 그 기업이 새 사업을 하지 않아 포기해야 할 고용과 매출을 생각하니 한숨이 나왔습니다.”

조성욱 공정거래위원장이 지난해 11월 4일 오전 서울 중구 롯데호텔에서 열린 제11회 서울국제경쟁포럼 개회식에서 개회사를 하고 있다.(사진=연합뉴스)


독점규제 및 공정거래에 관한 법률(공정거래법)에 달린 많은 형벌을 지적하던 한 경제학과 교수의 우려다. 공정거래법은 시장경제체제의 기본원리인 `기업의 공정하고 자유로운 경쟁`을 촉진하는 것이 목적이지만, 과도한 형벌조항이 오히려 기업을 위축시키고 이중처벌 우려도 크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는다. 또 형벌을 최소화할 목적으로 도입된 공정거래위원회 전속고발권은 의무고발요청제 등으로 인해 크게 훼손되고 있다는 지적도 많다.

담합·시지남용·불공정행위 모두 형벌…OECD 35개 중 유일

9일 학계 등에 따르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5개국 중 대다수는 공정거래법에 담합(카르텔)을 제외하고는 형벌조항이 없다. 과징금 등 행정제재만 부과한다는 얘기다. 이들 국가 중 독일 등 16개국은 담합에 대한 형사처벌 조항도 형법에 포함(입찰방해), 공정거래법에는 아예 형벌이 없다. 미국은 담합 및 시장지배적지위남용(시지남용)에 대한 형벌은 있지만, 시지남용은 기소 대상에서 제외돼 사실상 담합만 형사처벌한다.

(그래픽=이데일리 김일환 기자)
반면 한국은 공정거래법상 담합·시지남용·불공정행위 모두 형벌조항이 있다. 이들 모두에 형벌조항을 둔 OECD 국가는 한국이 유일하다. 1980년 우리 정부가 공정거래법을 만들 당시 모델로 삼았던 일본도 담합·시지남용에만 형벌조항이 있다. 한국은 40년 만에 공정거래법을 전면 개정하면서 △기업결합 △거래거절 등 일부 불공정거래행위 △사업자수 제한 등 일부 사업자단체 금지행위 등 일부 형벌을 삭제했지만, 여전히 글로벌 스탠더드와는 현격한 차이가 있다. 공정위의 다른 소관법률인 하도급법, 대리점법, 대규모유통업법 역시 모두 형벌조항이 있다.

공정거래법상 형벌조항을 세부적으로 보면 규정 위반뿐 아니라 시정조치나 행정의무 불이행에 대한 형벌도 빼곡하다. 신고나 공시 등과 같은 질서위반행위까지 형사제재 대상에 포함한 까닭이다. 예를 들어 대기업집단 지정을 위해 친족 등 특수관계인 현황, 주식소유 현황 등 지정자료를 제대로 제출하지 않을 경우 2년 이하 징역 또는 1억5000만원 이하 벌금의 형사처벌을 받을 수 있다.

재계 관계자는 “기업집단에 따라 많게는 200~300명의 친족이 있어 파악이 쉽지 않고, 정보침해를 이유로 협조를 거부하는 경우도 많아 지정자료 담당자들은 누락되는 친족이 있을까 늘 조마조마하다”고 토로한다.

대다수 국가가 공정거래법(경쟁법)상 형벌을 최소화한 이유는 간단하다. 공정거래법의 궁극적 목적은 공정하고 자유로운 시장경쟁 촉진인데, 국가의 가장 강력한 처벌인 형벌이 들어오면 수사기관이 개입해 형사 사건이 되고 나아가 경제활동이 위축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업무상 횡령·배임이나 탈세와 같은 명백한 범죄와 기업 활동 중 발생하는 공정거래법 위반을 동일시해 모두 형벌로 다스린다는 자체가 글로벌 스탠더드와 거리가 멀다.

권남훈 건국대 경제학과 교수는 “형벌이 존재한다는 것만으로도 행정기관의 재량 범위가 넓어지고 반대로 기업은 불확실성이 지나치게 커지게 된다”며 “또 담합을 제외한 대부분 공정거래법 위반은 행위 순간 위법인지도 알 수 없고 한참을 따져봐야 하는데 이를 두고 형벌을 부과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지적했다.

지철호 전 공정위 부위원장도 “세계 각국이 공정거래법을 만들면서 공정위와 같은 별도 행정기관을 만든 것은 형벌이 아닌 과징금 등 행정제재로 충분한 부분이 많기 때문”이라며 “공정거래법 위반에 대한 형벌은 담합, 부당지원·부당내부거래, 시정조치 불이행 등으로 충분하다”고 강조했다.

(그래픽=이데일리 이미나 기자)
전속고발제 무력화하는 ‘의무고발요청제’

한국은 공정거래법에 따른 형벌이 남용되지 않도록 전속고발제를 운영 중이다. 전속고발제란 공정거래법, 하도급법 등 공정위 소관법률에 대한 고발 여부를 공정위가 결정할 수 있도록 한 제도다. 검찰 등 수사기관 시각이 아닌 공정위가 공정거래법 취지에 맞게 행정제재 이후 마지막 수단으로 형벌을 사용토록 하기 위함이다. 현재 전속고발제를 도입한 나라는 한국과 일본 두 나라뿐이다.

하지만 이른바 `담합천국`으로 불리는 일본은 한국보다 형사고발 건수가 비교하기 어려울 정도로 적다. 2012~2019년 통계만 봐도 공정위 고발 건수(의무고발요청건 제외)는 총 518건(1년 평균 64.75건)에 달했으나, 같은 기간 일본 경쟁당국인 공정취인위원회 고발은 4건에 불과했다. 1년 평균 0.5건으로, 한국과 비교해 약 130분의 1 수준이다. 거칠게 요약하면, 우리보다 전속고발제를 통한 형벌 최소화 목적이 훨씬 더 잘 구현되고 있는 셈이다.

학계에는 공정거래법에 따른 형사처벌 조항을 줄이기 위해 도입된 전속고발제가 의무고발요청제로 훼손되고 있다는 비판도 많다. 의무고발요청제란 검찰·중소벤처부·조달청·감사원 등 4개 기관이 공정위에 고발을 요청할 경우 공정위 자체 전속고발권 판단과는 관계없이 고발해야 하는 제도다.

앞서 2020년 9월 공정위는 네이버의 부동산 정보업체에 대한 시지남용·불공정거래 행위가 과징금으로 충분하다고 판단했으나, 중소벤처기업부가 의무고발요청권을 행사해 네이버는 결국 검찰에 고발됐다. 해외 다수 국가는 형벌도 없는 시지남용 행위가 형사사건화 되는 것을 공정위가 필터링했지만 결국은 소용없게 된 셈이다. 한국경쟁포럼 회장인 신현윤 연세대 명예교수는 “의무고발요청제는 공정거래법 및 시장·기업에 대한 이해보다는 막연한 반(反)대기업 정서에 편승해 작동할 수 있다는 점에서 우려가 크다”고 말했다.

물론 형벌을 줄이는 것이 시기상조라는 반론도 있다. 고려대 경영학부 교수인 김우찬 경제개혁연대 소장은 “현재 낮은 과징금 수준으로는 충분한 제재가 어렵기 때문에 앞으로 과징금이 높아지고 민사소송이 제대로 작동한 다음에 형사처벌 완화를 고민해도 늦지 않다”며 “섣불리 고발하지 않기로 하면 아무런 기업범죄 예방 효과가 없어진다”고 우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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