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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일리 김보겸 기자] 코로나19 대유행이 본격 시작된 지난해 3월 CNN 메인 앵커 동생과 뉴욕주지사 형이 때아닌 엄마 쟁탈전을 벌였다. 동생 크리스 쿠오모(51) 앵커가 선공을 날렸다. “주지사님, 뉴욕을 위해 열심히 일하시는 건 알지만, 엄마한테 전화할 시간 정도는 있을 텐데요.” 이어진 앤드루 쿠오모(64) 주지사의 반격. “이미 여기 출연하기 전에 전화했죠. 그런데 엄마가 가장 좋아하는 자식은 저라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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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살 어린 동생 한 번 이겨보겠다고 계속해서 “내가 첫 번째, 너는 그 다음”을 외치는 쿠오모의 모습에 미국인들은 열광했다. 코로나19로 지친 이들에게 위로와 즐거움을 줬다는 것이다. 2009년 이혼한 뒤 세 딸을 홀로 키우는 쿠오모는 코로나19 브리핑에서 딸들과 관련한 일화를 자주 언급하는 등 ‘딸바보’ 아빠로도 유명하다. 동생과의 케미, 딸바보 아빠, 유쾌한 마마보이로서의 이미지가 적극적으로 코로나19에 대처하는 모습과 시너지를 일으키며 쿠오모 인기가 치솟았다.
그리고 1년여 뒤. 쿠오모는 성추행 의혹이 사실로 밝혀지며 거센 사퇴 압박 속 마지못해 주지사 자리에서 물러난다고 10일(현지시간) 발표했다. 영국 가디언은 “뉴욕의 악명높은 마초 정치가 점차 변화하고 있다는 증거”라고 평가했다. 겉으로는 가정적이고 여성을 존중하는 이미지를 꾸며낸 쿠오모의 몰락은 달라진 정치환경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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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오모는 아버지에 이어 뉴욕주지사를 지내 집안을 정치 명문가로 만들었다. 그의 아버지 고(故) 마리오 쿠오모 전 뉴욕주지사는 11년간 뉴욕을 이끈 3선 의원으로, 뉴욕엔 그의 이름을 딴 ‘쿠오모 거리’, ‘쿠오모 다리’가 있을 정도다.
아버지가 ‘철인왕’이라면 쿠오모는 야심차고 무자비한 ‘스트리트 파이터’로 통했다. 정적에게는 정치 보복도 불사하고 사석에서는 돌직구 언행으로 상대를 불편하게 하는 데에도 거리낌이 없었다. 이처럼 쿠오모가 마초 스타일을 보인 것은 아버지의 그늘에서 벗어나 자신의 독립성을 과시하기 위한 의도로 보인다.
지난해 코로나19 대유행은 그의 인기를 급상승시켰다. 매일매일 파워포인트로 뉴욕의 코로나19 현황을 알리며 투명하게 정보를 공개하는 정치인의 모습을 보였다. 특히 당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전문가들의 조언에 귀를 막고 방역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상황과 비교되면서 민주당 내 대선후보로 급부상했다. 뉴욕 주민 87%가 그를 지지했을 정도였다. 3선에 성공한 뉴욕주지사였지만 대선 출마의 꿈은 접었던 아버지를 넘어서는 듯 보였다.
이뿐만 아니다. 뉴욕주가 노인요양시설 코로나19 사망자 수를 은폐하고 축소한 사실이 드러나면서 코로나 영웅으로 떠오른 쿠오모의 신뢰도에 신뢰도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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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정적으로 그를 무너뜨린 건 성추행 폭로다. 지난해 말 쿠오모의 보좌관이었던 30대 여성이 트위터에 수년간 성추행당했다는 사실을 밝힌 후 피해 증언이 잇따랐다. 현재까지 드러난 피해자만 11명이다. 쿠오모는 “친근함의 표시일 뿐”이라며 혐의를 부인하며 자진 사퇴는 없다는 입장이었지만, 뉴욕주의회가 탄핵 절차에 돌입하자 떠밀리듯 내려왔다.
쿠오모의 사퇴는 마초 정치의 종식을 선언하는 신호탄이 될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가디언은 “점점 더 많은 여성들이 정계에 진출하면서 뉴욕의 악명 높은 마초 정치도 변화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한때 ‘미투’(Me too·나도 피해자다)의 옹호자를 자처하면서 뒤에서는 권력형 성범죄를 저질러 온 쿠오모의 몰락은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나 박원순 전 서울시장 등 국내 정치인과도 오버랩되는 듯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