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조는 사도세자가 15세의 나이로 대리청정하기 전까지 8번의 양위(讓位·임금의 자리를 넘겨줌)선언을 했다. 영조가 첫 번째 양위선언을 했을 당시 세자는 불과 5살. 현실적으로 세자가 대리청정도, 왕위를 받을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왕위를 넘기겠다는 왕명에 조정대신들은 앞다투어 ‘아니 되옵니다’를 외칠 수밖에 없었고 이는 영조 52년 장기집권의 초석이 됐다
김 대표는 ‘셀프공천’ 논란으로 당 대표로의 권위와 리더십이 흔들릴 위기에 처하자 당무거부에서 사퇴카드로 수위를 높여갔다. 일견 자신의 비례대표 2번 배치를 둘러싼 당 안팎의 비판에 대한 모욕감을 앞에 내세웠지만 이면에는 당 주도권을 둘러싼 헤게모니 다툼이 있었다.
비대위에 대한 군기잡기도 있었다. 비대위가 올린 비례대표 후보명단이 문제가 되자 김 대표는 “자기는 자신을 포함한 4명의 비례대표를 지정했을 뿐이니 문제가 된 부분은 비대위원들이 해결하라”고 말했다. 그러나 정작 중재안이 자신의 비례번호를 2번에서 14번으로 옮기는 것으로 나오면서 김 대표는 매우 분노했다는 후문이다.
일련의 논란 속에서 김 대표는 공천 작업을 마무리한 후에도 당 대표로서의 권한을 발휘할 수 있는 당내 리더십을 재확인하고 20대 국회로의 티켓도 얻어냈다.
김 대표의 사퇴 카드는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김 대표는 2012년 대선 당시 박근혜 대통령후보를 위해 활동할 때도 여러번 사퇴카드를 내밀었다. 당시 김 대표는 비대위원과 국민행복추진위원장으로 활동하며 인적 쇄신과 경제민주화를 주장했고 당내 반발이 거세지자 세 번에 걸쳐 사퇴와 복귀를 반복하며 자신의 뜻을 관철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