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히 이 부회장이 이번 출장에서 반도체 장비 업체 ASML을 방문한 점이 주목된다. 극자외선(EUV) 노광장비를 독점 공급하는 ASML 경영진과 만나 빠른 납품을 요청했을 것이란 관측이 나온다. 대만 TSMC와 벌이고 있는 파운드리(반도체 위탁 생산) 기술 경쟁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해선 EUV 노광장비 추가 도입이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ASML 본사 방문해 EUV 노광장비 공급 논의
14일 삼성전자(005930)에 따르면 이 부회장은 지난 13일(현지시간) 네덜란드 에인트호번에 위치한 반도체 장비 업체 ASML 본사를 찾아 피터 버닝크 최고경영자(CEO)와 마틴 반 덴 브링크 최고 기술 책임자(CTO) 등을 만났다. 삼성전자 DS부문장인 김기남 부회장도 배석했다.
이들은 7나노미터(nm) 이하 최첨단 반도체 생산에 필수인 EUV 노광장비 공급 계획과 운영 기술 고도화 방안, 인공지능(AI) 등 미래 반도체를 위한 차세대 제조기술 개발협력 방안 등에 대해 논의했다. 또 코로나19 사태 장기화에 따른 시장 전망과 ‘포스트 코로나’ 대응을 위한 미래 반도체 기술 전략 등에 대해 의견을 나눴다. 이 부회장은 이날 직접 ASML의 반도체 장비 생산공장을 방문해 EUV 노광장비 생산 현황을 직접 살펴보기도 했다.
ASML은 EUV 노광장비를 사실상 독점 공급하는 기업이다. 파운드리 부문에서 세계 1위인 대만의 TSMC과 기술 경쟁을 벌이고 있는 삼성전자 입장에선 안정적인 EUV 노광장비 확보가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EUV 노광장비의 공급량은 제한적이다. ASML은 지난해 처음 이 장비를 상용화한 후 지금까지 독점 공급하고 있다. TSMC는 현재 20대의 EUV 노광장비를 운용하고 있으며, 2021년까지 무려 50대의 EUV 노광장비를 구매하겠다고 선언한 상태다. 지난해 ASML에서 10대의 EUV 노광장비를 구입한 삼성전자는 평택캠퍼스 반도체 2라인 가동을 위해 장비 추가 도입이 필요한 상황이다. 삼성전자와 TSMC의 구매 경쟁이 벌어지고 있는 셈이다.
업계 관계자는 “세계 파운드리 업계 각각 1, 2위인 TSMC와 삼성전자는 공급이 제한적인 EUV 노광장비를 안정적이고 빠르게 조달받기 위해 ASML과 긴밀한 관계를 구축하고 있다”며 “이재용 부회장의 ASML 본사 방문도 이러한 맥락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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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부회장은 IOC 방문 이유에 대해선 언급하지 않았지만, 업계에선 내년으로 연기된 도쿄올림픽 후원과 관련된 것이 아니냐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 삼성전자는 한국 기업 가운데 유일한 최상위 등급(TOP·The Olympic Partner)의 공식 후원사로, 1988년 서울올림픽부터 30년 넘게 TOP 계약을 이어오고 있으며, 최근 2028년까지 공식 후원을 연장한 바 있다.
이 부회장이 ‘스포츠 외교’를 재개하는 것 아니냐는 추측도 있다. 앞서 이 부회장의 부친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은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 당시 IOC 위원으로 선출돼 2017년 건강 문제로 사퇴할 때까지 국내에서 최장 기간 스포츠 외교사절로 활동했다. 이 부회장이 이 회장을 대신해 한국이 IOC와 협조하는 방안을 토마스 바흐 IOC 위원장과 긴밀하게 논의했을 것이라는 해석이 나온다.
한편 이 부회장은 이번 유럽 출장을 시작으로 기업인 신속통로(입국절차 간소화)가 허용된 베트남·일본 등 해외 현장 방문과 글로벌 기업들과의 교류에 본격적으로 나설 전망이다. 다만 경영권 승계 문제와 국정농단 사건에 대한 재판에 발이 묶일 가능성도 있다. 이 부회장은 기자들에게 “다음 출장은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