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운기에 깔린 80대 노인 구한 소방관[매일 불구덩이에 뛰어드는 사람들](30)

광주 남부소방서 정지훈 소방관, 2022년 8월 "경운기에 사람이 깔렸다" 신고 접수
가파른 비탈길에 놓인 경운기 추락 위기서 침착히 대처하며 노인 구조
"바위 같은 모습으로 국민 생명 지키고 선한 영향력 줄 수 있길"
  • 등록 2024-05-30 오후 6:57:59

    수정 2024-05-30 오후 6:57:59

[편집자 주] ‘퍼스트 인, 라스트 아웃(First In, Last Out·가장 먼저 들어가 가장 늦게 나온다)’ 소방관이라면 누구나 마음속 깊이 새기는 신조 같은 문구다. 불이 났을 때 목조 건물 기준 내부 기온은 1300℃를 훌쩍 넘는다. 그 시뻘건 불구덩이 속으로 45분가량 숨 쉴 수 있는 20kg 산소통을 멘 채 서슴없이 들어가는 사람들이 바로 소방관이다. 사람은 누구나 위험을 피하고자 한다. 그러나 위험에 기꺼이 가장 먼저 뛰어드는 사람들이 바로 소방관인 것이다. 투철한 책임감과 사명감 그리고 희생정신 없이는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들의 단련된 마음과 몸이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킨다. 그러나 그들도 사람이다. 지난해 10월 국회 행정안전위원회 소속 기본소득당 용혜인 의원이 소방청에서 제출 받은 ‘소방공무원 건강 진단 현황’ 자료에 따르면 2022년 소방공무원 정기 검진 실시자 6만2453명 중 4만5453명(72.7%)이 건강 이상으로 관찰이 필요하거나 질병 소견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건강 이상자 중 6242명(13.7%)은 직업병으로 인한 건강 이상으로 확인됐다.

이상 동기 범죄 빈발, 기후 변화 등으로 인해 점차 복잡해지고 대형화되는 복합 재난 등 갈수록 흉흉하고 각박해져 가는 세상에, 매일 희망을 찾아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농연(濃煙) 속으로 주저 없이 들어가는 일선 소방관들. 평범하지만 위대한 그들의 일상적인 감동 스토리를 널리 알려 독자들의 소방 업무에 대한 이해도를 높이고 소방관에 대한 감사한 마음을 고취하고자 기획 시리즈 ‘매일 불구덩이에 뛰어드는 사람들’을 지난해 11월 9일 ‘소방의 날’을 시작으로 매주 한 편씩 연재한다.
정지훈 소방관 등 구조 대원들이 지난달 25일 광주시 남구 서대문로 37 광주에서 나주 가는 방향 1차로 도로상에서 발생한 차량 추돌 사고로 운전자가 갇히자 유압 장비를 활용해 구조 작업을 하고 있다. 사진=정지훈 소방관 제공.
[이데일리 이연호 기자]지난 2022년 8월 4일 오전 7시께. 광주 남부소방서 정지훈(36) 소방관은 아침을 먹으러 구내식당에 들어가던 참이었다. 그때 출동 벨이 울렸다. 농기계에 사람이 깔렸다는 신고였다. 신고자였던 한 행인은 구조 대상자가 크게 고통을 호소하진 않고 있으며 사고 위치가 평지라고 했다. 의식도 명료하며 외부 출혈도 없다고 했다.

정 소방관은 단순 깔림 사고는 그동안 수없이 맞은 상황이라 큰 긴장감 없이 출동했다. 에어백을 활용해 물체를 들어내고 구조 대상자를 빼내면 되는 비교적 쉬운 작업이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정 소방관은 “출동 내용의 경중을 나눠 벌집 제거와 같은 비교적 가벼운 출동에서는 가벼운 마음으로, 수난 구조 및 화재 현장에서의 인명 구조와 같은 경우 긴장한 상태로 출동한다”며 “이렇게 출동 내용에 따라 마음가짐을 다르게 함으로써 피로도를 최소화해야 24시간을 멀쩡하게 버틸 수 있으며 심적 충격을 완화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현장은 정 소방관의 예상과는 너무나도 달랐다. 구조 대상자인 80대 남성 A씨의 깔린 위치가 좋지 않았다. A씨는 경운기의 운전석과 짐을 싣는 뒷부분인 트레일러 사이에 허리 아래 하반신이 깔려 있었다. 게다가 앞쪽인 운전석 부분은 경사가 가파른 농로 비탈길에 있었다. 작은 움직임에도 균형이 무너져 경운기가 경사로로 추락할 수 있어 에어백을 사용하기가 어려웠다. 최악의 경우 구조 대상자가 같이 쓸려 내려갈 수 있었다.

정 소방관은 잠시 동안이지만 구조 방법을 두고 깊은 고민에 빠졌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것은 비탈길의 지반이 비교적 단단하다는 점이었다. 뒷바퀴에 고임목을 받치고 버팀목을 통해 경운기를 안정적으로 고정시킬 수 있었다. 이후 A씨의 하반신을 누르고 있던 경운기의 트레일러 부분을 전문 장비를 사용해 천천히 그리고 신중히 들어냈다. 조금씩 A씨 몸과 트레일러에 틈이 생겼고 충분한 공간을 확보한 순간 신속히 트레일러에서 구조 대상자의 신체를 확보해 구조했다.
지난 2022년 7월 10일 광주시 남구 승촌동의 어느 마을 진입로에 고목이 쓰러지자 정지훈 소방관이 체인톱을 이용해 고목 절단 작업을 하고 있다. 사진=정지훈 소방관 제공.
그렇게 정 소방관은 무사히 인명 구조 작업을 끝내고 A씨를 구급대에 인계한 후 소방서로 돌아갔다. 그러나 현장에서 사용한 장비를 정리한 뒤 밀린 행정 업무를 마무리하자 마음 한편에 찜찜한 감정이 몰려왔다. 성공적으로 구조 활동을 했으나 ‘만에 하나 지반이 약해 고정이 쉽지 않았고, 들어내는 과정에 경운기가 추락하는 최악의 시나리오가 발생했으면 어떻게 됐을까?’라는 아찔한 생각 때문이었다. 이후 정 소방관은 약 일주일 동안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출동 전 가벼운 마음가짐에 대한 일종의 죄책감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런 불안감도 오래가진 않았다. 정 소방관의 팀장이 정 소방관을 포함한 팀원들을 모아 놓고 한 유튜브 영상을 틀어 줬는데 거기에 A씨가 나왔기 때문이었다. A씨는 인터뷰 영상에서 정정한 모습으로 활짝 웃으며 정 소방관 등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그동안의 어지러웠던 마음이 일순간에 해소되며 그 자리를 뿌듯함이 채웠다.

정 소방관은 “수백 수천 건의 출동을 경험하다 보니 심적인 후폭풍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란 사실을 알게 됐다. 그 충격들을 통해 제가 조금씩 단단해지고 있음을 느끼기 때문이다”라고 언급했다.

앞으로의 목표를 묻자 정 소방관은 “꾸준한 체력 관리와 구조 역량 강화를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겠다”며 “그런 노력들을 통해 바위 같은 단단한 모습으로 국민들의 생명을 지키고 주변 동료들에게도 선한 영향력을 줄 수 있다면 더 바랄 것이 없다”고 강조했다.
정지훈 소방관. 사진=본인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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