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일 강원도 강릉 사근진 해변. 해안선을 따라 즐비했던 ‘오션뷰 펜션’들은 신기루처럼 사라져 있었다. 건물 외벽에 떨어질 듯 말 듯 붙어 있는 철판은 바람에 휘날리며 기괴한 소리를 냈다. 경포호를 둘러싼 펜션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화마가 할퀴고 간 곳엔 여전히 잔불 정리를 하는 소방차들이 눈에 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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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오후 찾은 강릉 아이스아레나 경기장은 90여 개 텐트로 빼곡히 채워져 있었다. 전날 산불로 집을 잃은 이들을 위한 임시 대피소였다. 이불가지와 생수 등 간단한 생필품이 마련된 텐트 앞에 덩그러니 놓인 휠체어와 의족은 대피 당시 긴박했던 상황을 짐작케 했다. 삼삼오오 모인 피해 주민들은 “모자를 벗고 두 손으로 잡고 있는데도 날아갈 것 같았는데, 바람이 이래 부는 건 처음 봤다”고 혀를 찼다.
이재민들은 바람을 타고 빠르게 번진 산불에 옷가지도 챙기지 못하고 간신히 몸만 챙겨 나왔다고 했다. 임호정(60)씨는 “불씨가 15분 만에 집으로 옮겨붙어서 밥 먹다가 싱크대에 다 놓고 휴대폰이랑 지갑만 들고 뛰쳐나왔어, 가재도구 하나도 못 건졌잖아”라며 “집이 서서히 타들어가는 모습을 건너편에서 똑똑히 지켜봤는데 트라우마 때문에 한숨도 못 잤어, 병원가서 약 처방 받아야겠어”라고 호소했다.
은퇴 후 고향인 강릉에 내려왔다는 임호철(67)씨는 손수 지은 집이 뼈대만 남은 채 사라져버렸다고 했다. 임씨는 “아침에 애 엄마를 시내에 태워주고 집에 가니까 연기가 너무 자욱해서 들어갈 수가 없더라고, 그래서 밖에 계속 서서 지켜볼 수밖에 없었어”라며 “고작 10분이었는데 순식간에 산 능선을 타고 불이 번져서 집까지 덮쳤어”라고 했다. 이어 “경치 좋은 소나무 숲에 집을 지었는데 이게 위험요소가 될 줄 몰랐지”라고 한숨 쉬었다.
일부 이재민은 이날 완전히 타버린 터전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곤 식음을 전폐하기도 했다. 이재민 A씨는 “보면 눈물만 나고, 마음이 너무 아파. 뭘 먹고 싶은 생각도 안 들어”라며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흐느꼈다. 60대 김모씨는 “우리 마을은 세 채 남기고 다 탔어”라며 “혈압약을 먹었는데도 머리가 너무 아파, 아까 혈압이 계속 올라서 재보니까 180까지 올랐더라”고 했다.
펜션 주인들도 황망해하긴 마찬가지였다. 최근 펜션 리모델링을 했다는 최모(71)씨는 성수기를 맞아 주말 손님을 받을 생각에 들떠있다가 날벼락을 맞았다고 했다. 그는 “휴대폰마저 두고 나와 연락수단도 없다”며 “불이 난 걸 (예약손님들에) 어떻게 알려야 할지 모르겠다”고 했다. 다른 펜션주인 50대 이모씨는 “맨발로 뛰쳐나왔는데 앞으로 뭐 먹고 살라는 거냐”며 “정부에서 다 보상해줘야 하는 거 아닌가”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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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은 주민들 집과 펜션단지뿐 아니라 식당, 공방, 편의점 등을 모두 덮쳤다. 경포대 인근의 사찰인 ‘인월사’와 정자 ‘상영정’ 등도 전소되면서 일부 문화재도 피해를 입었다.
초속 30m에 달했던 바람이 초속 1∼12m로 잦아들었지만 여전히 다소 강한 바람이 부는 탓에 산림 당국은 재발화 방지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산림당국은 이날 장비 213대, 인력 800여명을 투입해 잔불을 진화하고 있으며 소방 헬기 1대, 산림청 헬기 1대 등을 투입해 뒷불감시 작업에 돌입한다. 강원도소방본부에 따르면 이날 오전까지 “주변에서 나무가 타고 있다”, “불꽃이 보인다”, “연기가 보인다” 등 재발화 의심 신고가 40건가량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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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시 대피소에서 생활하는 이재민들도 피해 복구를 위해 자체적으로 비상대책위원회를 꾸릴 채비를 하고 있지만, 재난을 당해 신경이 곤두선 이재민들 사이에선 마찰도 일었다. ‘대표성 있는 비대위’를 꾸릴 구심점이 잡히지 않아서다. 비대위를 조직하고 있는 최모씨는 “모든 이재민을 포함시켜서 비대위를 만들면 의견이 분분해서 시작하기가 어렵다”며 “우선 일부 의견을 수렴해 비대위를 만들고 나서 비대위 가입 신청자들에게 알릴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최대한 많은 사람들의 의견을 종합해 빠른 피해 복구에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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