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리까지 물 차고 돌도 굴러들어와”…강남 판자촌, 또 수해[르포]

10일 서울 강남 구룡마을 가보니
뒷산서 빗물 토사 쓸려 내려와 ‘아수라장’
주민들, 진흙범벅된 살림살이 도랑서 씻고 복구 ‘진땀’
“매번 이렇게…” 이재민 대피소서도 ‘한숨’
  • 등록 2022-08-10 오후 4:27:26

    수정 2022-08-10 오후 9:18:29

10일 오전 서울 강남구 구룡마을 소재 집들에선 이불 등 각종 물품과 진흙이 뒤범벅 돼 있었다.(사진=황병서 기자)
[이데일리 황병서 기자] “집안에 물이 허리까지 찼다니까. 가만히 뒀으면 죽었을 거야, 살려줘서 고맙지.”

서울 강남구 개포동 구룡마을에서 30년째 살고 있다는 A(88·여)씨는 지난 8일 오후 10시께 집안에 빗물이 허리까지 차오를 즈음 구조됐다. 순식간에 불어난 도랑물이 집안으로 한꺼번에 쏟아져 들어와 손 쓸 도리가 없었다. 그 순간 이웃집 남성이 들어와 A씨를 둘러업었다. A씨는 “아저씨가 ‘어르신 목을 꼭 잡으세요’라고 하기에 꼭 잡고 업혀 나와 살았다”고 했다.

양재대로 건너편, 수십억 원을 호가하는 강남 고가 아파트단지를 마주하고 있는 구룡마을은 강남의 마지막 판자촌이다. 재난·재해에 취약한 비닐이나 합판 등으로 지어진 낡은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다. 수십 년째 개발이 지연되면서 제대로 된 정비가 이뤄지지 않아, 2000년 이후에도 수차례 화재 사고와 수해를 입은 곳으로 이번에도 수마를 피하지 못했다.

10일 오전 찾은 구룡마을 일대는 지난 8일부터 이어진 ‘물 폭탄’에 아수라장이 돼 있었다. 마을 뒷산인 구룡산과 대모산에서 이어진 개천에 가까이 붙어 있던 집들에선 침수·붕괴 피해가 속출했고, 마을 입구 도로는 개천을 따라 떠내려온 토사가 쌓여 바리케이드로 막혀 있었다.

구룡마을 입구 교차로에선 굴착기 한 대가 연신 토사를 퍼올렸다. 유귀범 구룡마을 주민자치회장은 “마침 도로 아래 빗물 저장소를 짓기 위한 공사가 진행되고 있었는데, 이번 수해로 상황이 복잡해졌다”고 토로했다.

입구를 지나니 호박과 고추 등을 심은 밭이 돌무덤으로 변해있었다. 뒷산 개천에서 폭우에 떠내려온 돌무더기에 작물들이 모두 묻혔다. 뻘밭처럼 푹푹 빠지는 밭 옆에선 주인이 흙을 떠내 물길을 내고 있었다. 밭 주인 이모씨는 “3년 전 도라지를 심으면서 올해는 내심 기대했는데 수해로 다 물 건너갔다”고 한숨 쉬었다.

뒷산에서 쏟아져내린 물줄기를 직격으로 맞은 집들은 쑥대밭이 됐다. 겨울철 방한을 위해 집 지붕에 올린 천이 빗물을 머금고 이 무게를 이기지 못해 집을 무너뜨린 것. 무너진 집안엔 각종 가재도구가 진흙과 뒤범벅이 돼 나뒹굴었다. 이 마을에서 35년째 거주 중인 주민 B(77·여)씨는 “어제는 떨어져 나간 문을 바닥에 깔고 위에 천을 덧대 잠을 청했다”고 했다. 50대 후반의 다른 주민은 “물난리가 여러 차례 계속 나다보니 이제는 지친다”면서 “집을 계속해서 고치는 것도 너무 힘들다”고 했다.

개천에서 떠내려온 돌무더기가 집 안으로 굴러들어와 복구작업만 기다리는 주민도 있었다. 주민 C(65·여)씨는 “이 큰 돌을 치우기 전엔 복구작업을 할 수도 없다”며 “집 뒤편을 뚫든지, 돌을 어떻게 빼내야 하나 고민 중”이라고 했다. 진흙더미인 식기도구 등을 도랑에서 씻는 사람들도 눈에 띄었다. 주민 D(64·여)씨는 “그래도 살아야 하지 않겠느냐”며 “구청에서 수해복구가 빨리 나왔으면 좋겠지만, 비가 다 온 뒤에 나온다고 들었다”고 말했다.

구룡마을 이재민 대피소 격인 구룡중학교에는 80여 텐트가 설치돼 100여 명 정도가 머물렀다. 대피소에서 만난 주민 D(90·여)씨는 “밤에 집에 빗물이 들이쳐 퍼내다가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서 뛰어 나왔다”며 “다시 돌아갈 생각을 하니 막막하다”고 했다.

이 마을이 언제 복구될지 현재로선 알 수 없다. 강남구청 관계자는 “우선 임시보호소를 마련했고, 현장에선 파손된 배수로와 무너진 축대 등을 보수하고 있다”며 “이재민 210명에게 담요 등 구호물품을 지급한 상태”라고 말했다.

10일 오전 서울 강남구 구룡마을에서 주민들이 수해 피해 정도를 살펴보고 있다.(사진=황병서 기자)
10일 오전 서울 강남구 구룡마을에는 개천을 따라 각종 목재가구와 철골 구조물이 떠내려온 모습(사진=황병서 기자)
10일 오전 서울 강남구 구룡마을에선 빗물을 머금은 천의 무게에 무너져 버린 집들이 넘쳐났다.(사진=황병서 기자)
10일 오전 서울 강남구 소재 구룡마을 내 일부 경작지가 뒷 산에서 떠내려온 돌무더기에 없어져버렸다.(사진=황병서 기자)
10일 오전 서울 강남구 소재 구룡중학교에는 구룡마을 이재민들의 임시 거처가 마련돼 있었다.(사진=황병서 기자)
SK하이닉스에서 보내온 구호 물품.(사진=황병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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