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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일리 김정남 기자] 현실론이냐, 원칙론이냐.
조선·해운업 구조조정의 공이 일부 한국은행으로 넘어오는 기류다. 산업은행 수출입은행 등 국책은행의 자본 확충 없이는 구조조정 작업이 어려운데, 그 과정에서 발권력을 동원하자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다.
여기에 박근혜 대통령이 양적완화 공약의 긍정 검토를 언급하면서 논쟁이 더 불붙고 있다. 양적완화는 산은이 발행하는 산업금융채권(산금채)을 한은이 직매입하는 게 골자여서 구조조정 논의와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
발권력 동원은 최후의 보루다. 없는 돈을 찍어내 정책금융(정부가 특정업종에 선별 지원하는 금융)에 쓰는 건 전례없는 위기라는 공감대가 형성된 이후에야 쓸 카드라는 게 다수의 전문가들의 견해다. 그렇다고 ‘국책은행이 돈이 없는데 어떻게 구조조정을 하느냐’는 현실론도 분명히 있다.
이 때문에 이왕 발권력을 쓴다면 국회까지 나서 책임 소재를 분명히 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기획재정부 금융위원회에다 한은 산은 수은, 더 나아가 여야까지 머리를 맞대야 하는 ‘고차방정식’인 것이다.
구조조정, 한은으로 공 넘어오는 기류
당장 거론되는 게 한은의 수은 출자다. 출자는 쉽게 말해 그냥 돈을 대주는 것이다. 기재부가 예산을 통해 현금출자 혹은 현물출자를 하는 방안도 있지만 이는 국회를 통과해야 하는 난관이 있다. 반면 한은은 7명의 금융통화위원회 의결만 거치면 된다. 따로 법을 개정할 필요도 없다.
금융권 안팎에서는 수은의 자금 상황이 생각보다 부실한 만큼 수조원 단위의 출자가 불가피하다는 관측이 나온다.
전문가들은 대체로 부정적인 의견이다. 성태윤 연세대 경제학부 교수는 “정책금융을 한다면 한은 발권력보다는 입법부 승인을 받은 재정으로 하는 게 맞다”고 했다. 윤석헌 숭실대 금융학부 교수는 “중앙은행이 개별 기업 구조조정에 나서는 건 해외사례도 거의 없다”면서 “수은이 본연의 임무도 아닌 구조조정 작업에 끌려들어가 부실화되고 있다”고 했다.
하지만 김상조 한성대 무역학과 교수는 “국책은행이 돈을 쓸 능력이 없을 정도로 상황이 아주 나쁘다”면서 “수은이 역할을 해야 한다면 자본 확충을 해야 한다. 한은은 이미 2대 주주(13.1%)로 돼있지 않느냐”고 했다.
“국제금융시장의 시각도 중요”
전문가들이 오히려 더 지적하는 건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다. 발권력을 동원하는 극약 처방이 너무 급박하게 이뤄지는 한국형 구조조정 방식을 더 우려하고 있다.
본의 아니게 정국의 중심에 선 한은도 내심 이를 바라고 있다. 단순히 절차만 따지면 금통위 의결만으로 수은 출자가 가능하지만, 사안의 엄중함을 볼 때 국민의 대표기관인 국회가 가이드라인을 줘야 한다는 것이다. 한은 한 인사는 “우리가 아예 귀를 닫겠다는 게 아니다”면서 “최후의 보루를 써야 하는 건 그만큼 신중해야 한다는 뜻”이라고 했다. 부실 산업군이 계속 등장할 수 있다는 점도 큰 부담이다. 또다른 관계자는 “그때마다 돈을 찍어낼 수는 없지 않느냐”고 했다.
김상조 교수는 “부실기업이 현대상선(011200) 한진해운(117930) 대우조선해양(042660)만 있다면 단발성 발권력은 가능하지만 앞으로 해결해야 할 문제는 이 정도가 아니다”면서 “궁극적으로는 정치적인 의사결정이 필요하다”고 했다.
국제금융시장의 시선까지 시야를 넓혀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최희갑 아주대 경제학과 교수는 “중앙은행의 움직임은 국제금융시장에서 지속적인 감시 대상”이라면서 “수은을 지원하지 않을 경우 생길 국가신용도 문제와 돈을 찍을 경우 생길 중앙은행 건전성 위험 문제 중 어느 쪽 비용이 더 클지 면밀히 봐야 한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