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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창 불똥 불가피
박수현 청와대 대변인이 이날 춘추관 브리핑을 통해 전한 문 대통령의 메시지는 어조부터 단호했다. “정치적 합의” “비공개 합의” “중대한 흠결” 등 파괴력 있는 단어들을 골랐다. “위안부 문제가 본질이고, 나머지가 본질일 수 없다”는 청와대 관계자의 발언에는 문 대통령의 메시지가 ‘재협상’이나 ‘합의 파기’ 수순을 밟을 것임을 강하게 암시했다. 당장 일본의 반발은 컸다. 일본 언론들은 문재인정부가 합의를 뒤집을 경우 한·일 관계가 급속히 악화할 것이라는 경고성 전망을 잇달아 내놨다. 요미우리신문은 “일본은 한국정부의 추가 조치 요구 등에 일절 응하지 않는다는 방침”이라고 썼다. NHK 방송은 고노 다로 외무상이 “‘전 정권이 한 것은 모른다’고 한다면 앞으로 한·일 간에는 어떤 것도 합의하기 힘들다”고 언급했다고 보도했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은 고노 외무상이 “비공개를 전제로 한 내용을 일방적으로 공개한 것은 매우 유감”이라고 했다고 적었다.
양 정상은 지난 7월 독일에서 가진 정상회담에서 ‘셔틀 외교’ 복원에 합의한 후 추진했던 문 대통령의 다음달 일본 방문은 어려워진 모양새다. 일본 정부 내부적으로 확정한 것으로 알려진 아베 총리와 고노 외무상의 평창올림픽 계기 방한도 불발될 가능성이 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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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시지 발신 시기가 문제라는 평가도 많다. 미국 측의 반응은 아직 확인되지 않았지만 위안부 합의가 버락 오바마 당시 미국 대통령의 중재 하에 이뤄진 것을 감안하면 냉랭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당장 미국 측이 평창올림픽 참석자의 격을 낮출 수도 있다. 미국은 현재 트럼프 대통령의 가족을 평창올림픽에 참석시킬 예정인데, 우리 정부는 장녀인 이방카 트럼프의 방한을 원하고 있다.
국제사회의 대북공조에 균열이 갈 수 있다는 지적도 있다. 야권은 “북핵으로부터 나라를 지킬 수 있는 최소한의 필요조건이 한미일 안보협력”이라며 “외교적 합의에 대한 문제제기를 할 때에는 전략적인 타이밍이 그 무엇보다도 중요한데, 가장 나쁜 타이밍을 선택했다”(장제원 자유한국당 수석대변인)고 했다. 다만, 우리 정부는 전날(27일) 한일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문제합의 검토 태스크포스(TF)’가 한일 위안부 합의에 대한 최종보고서를 발표하기 직전 관련 내용을 미국 측에 통보했다고 한다. 그러나 일본 정부에는 관련 내용을 설명하거나 정상 간 통화 계획은 “없다”(청와대 핵심관계자)는 게 청와대의 방침이다.
文정부, 위안부 문제를 국내 정치용으로 봐
정치권에선 문 대통령이 위안부 문제를 ‘외교’보다는 ‘국내 정치용’으로 보고 있다는 해석이 나왔다. 야권에선 전형적인 ‘내로남불’이라고 본다. ‘내가 하면 로맨스(국익), 남이 하면 불륜(적폐)’이라는 것이다. 신보라 한국당 원내대변인은 “한일 외교문서는 비공개 조항까지 탈탈 털어가며 공개하고 있다. 전 정부 적폐 몰아가기에 혈안이 돼 외교와 국익을 철저히 외면하고 있다”고 꼬집었다.
아베 정권이 93년 고노담화, 95년에 무라야마담화를 부정할 때 강력 반발했던 우리 정부가 오히려 양국 간 합의를 너무 쉽게 휴짓조각으로 만든 것 아니냐는 지적도 있다. 문 대통령은 불과 4개월전인 올 8월 청와대에서 한일 의원연맹 일본 측 대표단을 접견한 자리에서 “고노 담화와 무라야마 담화, 김대중(DJ) 전 대통령과 오부치 총리의 공동선언의 취지를 이어갔으면 한다”고 당부했다. 야권의 한 관계자는 “앞으로 우리가 DJ·오부치의 공동선언을 (일본 측에) 지키라 할 수 있겠는가. 외교적 보폭을 스스로 줄인 셈”이라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