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 '관세압박' 못 버티고…캐나다 '장수총리' 트뤼도 사임

16%까지 떨어진 당 지지도에 자진사임 결정
자유당 차기 총재 선출까지 캐나다 총리직은 유지
"사실상 무정부 상태"…정회에 법안 통과도 '일시정지'
미국과의 협상 중요한데…트럼프는 "51번째 주 되라" 조롱
  • 등록 2025-01-07 오후 4:01:25

    수정 2025-01-07 오후 6:40:42

쥐스탱 트뤼도 캐나다 총리가 6일(현지시간) 캐나다 오타와 리드 코티지 앞에서 총리직 사퇴 기자회견을 한 뒤 떠나고 있다. (사진=AFP)
[이데일리 정다슬 기자] 9년 넘게 캐나다를 이끌어 온 쥐스탱 트뤼도 캐나다 총리(54)가 6일(현지시간) 총리직 사임 의사를 밝혔다. 취임 즉시 캐나다와 멕시코에 25% 관세를 부과하겠다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인 취임을 불과 2주여 남기고서다.

트럼프 당선인은 트뤼도 총리의 사임소식이 전해진 후 자신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트루스소셜에서 “캐나다가 미국과 합병한다면 관세는 사라지고 세금은 대폭 인하될 것”이라며 “미국은 캐나다가 생존하기 위한 막대한 무역적자와 보조금을 감당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트뤼도는 사임한 것”이라고 밝혔다. 관세 협상을 위해 자신을 찾아온 트뤼도 총리에게 “51번째 미국의 주(州)가 되라”라는 조롱을 마지막까지 이어나간 것이다.

트뤼도 총리는 이날 캐나다 오타와 리도 코티지(총리관저)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당이 새 지도자를 선출하면 당 대표와 총리직에서 물러나려고 한다”고 말했다. 의원내각제인 캐나다에서는 집권당 대표가 총리직을 수행한다.

트뤼도 총리는 “이 나라는 다음 선거에서 진정한 선택지를 선택할 자격이 있다”며 “내가 내부에서 싸움을 벌어야 한다면 다음 선거에서 내가 최선의 선택지가 될 수 없다는 점이 자명해졌다”고 덧붙였다.

트뤼드 총리가 사임의사를 밝혔지만, 그는 새로운 자유당 대표가 선출될 때까지는 당 대표직과 총리직을 유지한다. 당초 캐나다 의회는 오는 27일 재개될 예정이었으나 트뤼도 총리는 3월 24일까지 정회 결정을 내렸다. 그 사이 자유당이 새로운 당 대표를 선출하면 당 대표직과 총리직을 넘기겠다는 것이다. 회기가 시작하면 자유당 정부에 대한 불신임안을 제출하고 조기 선거를 시행하려던 야당으로서는 허가 찔린 셈이다. 트뤼도 총리가 먼저 사임의사를 밝히면서 선거는 빨라야 5월로 미뤄질 예정이다. 만약 자유당이 계속 집권한다면 선거는 10월 말에 열린다.

문제는 당장 오는 20일 트럼프 당선인이 취임하는 상황에서 사실상 ‘무정부’ 상태가 3월 말까지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2016~2019년 주미 캐나다 대사를 지냈던 데이비드 맥노튼은 캐나다 공영방송 CBC와의 인터뷰에서 “현실은 오늘 사임이 발표하면 권력과 영향력은 즉시 사라진다는 것”이라며 트럼프 대통령이 돌아올 가능성에 대비해 정부가 준비할 수 있도록 몇 달 전 트뤼도 총리가 사임했어야 한다고 밝혔다. 그는 “우리는 몇 달 동안 불확실성을 겪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워싱턴에 있는 윌슨센터 캐나다 연구소의 하비에르 델가도 연구원은 트럼프 2기 행정부가 어떤 정책을 펼치든 캐나다경제에는 불리할 수밖에 없다고 밝혔다. 캐나다-미국 기업인들로 구성된 미래 국경 연합 대표이사인 로라 도슨 역시 “이보다 나쁜 시기에 이뤄질 순 없다”며 “미국과의 관계는 이렇게 방치될 여유가 없다”고 밝혔다.

멜라니 졸리 외무부 장관, 도미닉 르블랑 재무부 장관 등 주무부처 장관들이 트뤼도 총리의 후임을 잇는 주요 경쟁자라는 것 역시 정책 공백을 낳을 수 있다는 우려를 키우고 있다. 이외 마크 카니 전 캐나다은행 총재와 트뤼도 총리와 각을 세우다 지난해 12월 16일 전격 사임한 크리스티아 프리랜드 전 재무부 장관 등도 차기 자유당 총재 하마평에 오르고 있다.

의회가 정회된 상황에서 입법적 절차를 통한 대응이 불가능해졌다는 것 역시 문제다. 트뤼도 정부가 트럼프 당선인이 제기한 불법 이민자 단속 강화를 위해 국경 보안에 13억달러를 투자하겠다는 법안 역시 의회가 닫혀 있는 동안은 통과가 불가능해졌다. 다만 트럼프 1기 행정부에서 캐나다산 철강과 알루미늄 제품에 관세를 부과했을 당시 트뤼도 정부는 미국산 철강, 알루미늄, 농산물, 소비재 등에 즉각적으로 보복관세(counter-tariffs)를 부과했는데 이는 의회 승인 없이도 가능하다.

피에르 폴리에브 보수당 대표(사진=AFP)
일각에서는 정권 교체를 대비해 야당 정치인을 미국과의 협상 대표단에 포함해야 한다는 얘기도 나온다. 지난달 30일 나온 앵거스리드인스티튜트 여론조사에 따르면 자유당의 지지율은 16%를 기록해 157년 당 역사상 가장 낮았다. 반면 보수당의 지지율은 45%를 기록했는데 보수당 대표인 피에르 폴리에브는 정권 교체 시 차기 캐나다 총리로 가장 유력한 인물이다.

한때 가장 주목받았던 스타 진보정치인 트뤼도 총리의 퇴장은 진보정치의 마주한 씁쓸한 현실을 고스란히 보여준다는 지적도 나온다. 그는 재임 9년 동안 친(親)이민·친환경 정책을 추진했으나 물가상승과 경기침체, 이민자 논란 등으로 지지율이 급락했다. 취임 당시 70%에 달하던 그의 지지율은 지난달 22%까지 떨어졌다. 뉴욕타임스(NYT)는 “트뤼도는 다른 서방 지도자들과 마찬가지로 분노한 유권자들과 마주하고 통제력을 잃었다”며 “지난 20년 이상 대부분의 선진국을 지배해온 진보 정치가 오른쪽으로 이동하고 있다. 노동 계급의 경제 상황, 이민에 대한 불안, 기후 변화 관련 정치에 대한 피로감 증가에 따른 것”이라고 했다.

캐나다 정치 애널리스트인 타샤 케이리딘은 캐나다 보수주의 성향 매체인 내셔널포스트 기고문에서 “트뤼도가 다시 한번 캐나다를 배신했다”며 “한때 통합의 인물로 칭송받았던 지도자의 퇴임은 그가 만든 분열을 치유하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자기 연민이 찬 비참한 행위”라고 신랄하게 비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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