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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년 만에 막 내린 대권 도전
9일(현지시간) CNN에 따르면, 전국 개표율 92% 기준 득표율은 클린턴이 47.7%로 도널드 트럼프 공화당 후보(47.5%)보다 0.2%포인트 앞섰다. 하지만 주별 승자가 모든 대의원을 독차지하는 미국 승자독식 선거 방식에 따라 트럼프가 대통령에 당선됐다.
클린턴은 이날 승복 연설을 통해 “가장 높고 단단한 유리 천장을 이번에도 깨질 못했다”며 “그러나 언젠가 누군가는 우리가 지금 옳다고 믿는 이것을 꼭 해낼 것이며, 우리가 생각하는 시점보다 더 일찍 이뤄지길 바란다”고 말했다.
자신을 지지했던 여성 유권자들에게는 “당신들의 지지만큼이나 나를 자랑스럽게 한 것은 없었다”며 “지금 영상을 보고 있는 소녀들은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충분히 모든 기회와 행운을 잡을 수 있다는 것을 의심하지 말라”고 강조했다.
클린턴은 대선 승리 시 유리로 만들어진 천장으로 유명한 뉴욕 재비츠 컨벤션 센터에서 승리 연설을 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공화당의 도널드 트럼프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연설 대신 축하 전화를 걸어 패배를 인정했다.
비록 대권 도전에는 실패했지만, 클린턴은 이번 대선에서 자신감 넘치는 연설과 카리스마로 미국을 대표하는 여성 정치인으로 우뚝 섰다. 클린턴의 정치 경력은 그야말로 화려하다.
1947년 태어난 클린턴은 미 웰즐리여대 정치학과와 예일대 로스쿨을 졸업 후 법조인을 꿈꿨으며, 20대 무렵 베트남전 반대와 인종차별 반대 시위를 주도하며 진보진영에 이름을 알렸다. 로스쿨 시절 만난 빌 클린턴과 함께하기 위해 대도시를 마다하고 아칸소주 변호사로 일하다 힐러리는 아칸소대 로스쿨 교수를 거쳐 또 다른 로펌인 로즈법률회사에서 일했다. 이때 미 법조 잡지인 ‘내셔널 로 저널’에서 뽑은 ‘미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변호사 100인’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이후 남편 빌의 대통령 당선으로 클린턴은 퍼스트레이디로 백악관에 입성했다. 르윈스키 성 추문으로 마음고생도 했지만, 남편의 두 번째 임기 말인 2000년 뉴욕주 연방 상원의원으로 선출돼 2009년까지 재직했다. 영부인 신분이던 1995년 유엔 여성회의 총회에서는 ‘여권이 곧 인권’이라는 명연설을 남기기도 했다.
2007년 1월 클린턴은 미국 최초의 여성 대통령에 도전했다. 그러나 같은 당 경쟁자였던 버락 오바마 당시 후보가 과반이 넘는 대의원을 확보하면서 고배를 마셨다. 대신 오바마 행정부의 지명을 받아 2009년 1월 미 국무장관을 맡게 됐다. 국무장관으로서 그는 핵개발에 나선 이란에 대한 강경책과 이스라엘과 가자 지구 간 휴전 중재 등에서 탁월한 통솔력을 보였다.
결국 깨지 못한 미국 ‘유리 천장’
클린턴은 민주당 188년 역사상 처음으로 여성 대통령 후보에 올렸지만, 유리 천장을 깨는 데는 결국 실패했다. 이번 실패로 미국 여성들의 참정권 역사도 재조명 받고 있다.
미국 여성이 투표권을 얻은 것은 1차 세계대전 이후인 1920년 수정헌법 19조가 비준된 후다. 이는 남북전쟁(1861∼1865년) 직후 노예제 폐지로 흑인 남성이 1870년 투표권을 쟁취한 것보다 무려 50년이나 늦은 것이다. 정치 무대에 여성이 처음 등장한 것은 1894년 주의회 의원의 당선으로 시작됐으며, 최초의 여성 하원의원은 1916년, 최초 여성 상원의원은 1932년에 등장했다.
여성의 대통령 주자 역사도 큰 줄기를 찾아보기는 어렵다. 클린턴의 도전은 빅토리아 우드헐이 1872년 34세의 나이에 ‘평등권당’ 후보로 미 여성 최초로 대권에 도전한 지 144년 만이다. 우드헐은 첫 여성 대권 후보로 지명받았지만, 본선에서 한 표도 못 얻었다.